‘서킷’으로 간 럭셔리 스포츠카

[ 월간 CEO 2010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차와 사람 모두 땀과 기름으로 뒤범벅이 되고, 인간과 기계의 한계를 추구하는 원초적인 스포츠인 모터스포츠는 왠지 럭셔리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모터스포츠는 원래 귀족 스포츠였다.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세계 각지의 귀족과 부유층들은 탈것을 이용해 치르는 경주를 즐겨왔는데, 이것이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그들이 직접, 혹은 운전자를 고용해 대리로 경주에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다.

물론 자동차가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서민들이 참여하는 경주도 등장했지만,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모터스포츠는 참가를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 고급 스포츠다. 그래서 단순히 모터스포츠를 보고 즐기기보다 직접 팀을 운영하거나 스폰서가 되는 이들, 그리고 직업이 아니라 취미로 모터스포츠에 참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럭셔리 카 브랜드들이 잠재고객으로 염두에 두는 이들도 많다. 이런 배경이 럭셔리 카 브랜드들이 끊임없이 모터스포츠에 도전하고, 이들을 위한 특별한 차를 만드는 이유가 된다.

특히 최근에는 고성능 스포츠카로 취미삼아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어, 주요 럭셔리 브랜드들은 이들을 위해 개발한 새로운 모델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에도 세계 자동차 경주를 총괄하는 국제자동차연맹(FIA)의 GT3 경주차 규정을 따르는 차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GT3 경주차는 일반 도로를 달릴 수는 없지만,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시판 승용차를 바탕으로 FIA의 안전규정에 따라 최소한의 안전장비와 연료탱크를 갖추어 경주차 인증을 받은 차들도 출전할 수 있다. 흔히 수퍼카라고 불리는 고가의 고성능 스포츠카들이 GT3 규정에 맞추기 쉽기 때문에, 일부러 GT3 경주차 수준의 뛰어난 성능을 내는 모델을 특별히 한정 생산하는 메이커도 있다.

2009-Porsche_911_GT3_RS-1

GT3 경주차로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닌 모델로 포르쉐 911 GT3을 꼽을 수 있다. 이 차는 일반인들에게도 판매되는 포르쉐 911의 고성능 모델이지만, 포르쉐 애호가들을 위한 ‘포르쉐 수퍼레이스’ 또는 ‘포르쉐 카레라 컵’ 대회에 쓰이는 경주차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이들 대회는 같은 성능을 내는 한 차종으로 출전차를 제한해 순수하게 운전자와 팀의 기량만으로 승부를 가리는 원 메이크 레이스(One-make race)의 일종이다. 이 대회는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지역별 시리즈가 개최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아시아 지역 시리즈는 국내에서도 2~3년에 한 번씩 열리고 있다.

포르쉐 911 GT3는 포르쉐 원메이크 레이스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GT 경주에서도 활약하고 있는데, 여러 메이커의 차종들이 같은 서킷을 달리는 경주에서는 포르쉐 911 GT3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경주에 출전하는 차들 가운데에도 럭셔리 브랜드의 것들이 적지 않은데, 오는 5월 15~16일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리는 24시간 경주도 여러 럭셔리 브랜드의 경주차가 우승컵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2009-Audi_R8_LMS_GT3-1

이 경주에는 포르쉐 911 GT3과 같은 GT3 클래스에 아우디 R8 LMS가 출전한다. 이 차는 아우디 첫 시판 수퍼카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끈 R8의 GT3 경주차 버전이다. 시판차에는 아우디 고유의 네바퀴굴림 장치인 콰트로(quattro)가 쓰인 것과 달리 R8 LMS는 뒷바퀴굴림 방식이다. 이는 네바퀴굴림 장치를 금지하는 GT3 규정 때문. 그래서 나머지 부분은 시판되는 R8과 큰 차이가 없지만 변속기를 새로 개발한 뒷바퀴굴림 전용으로 바꾸었다. 물론 시판차와 주행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경주차에 중요한 내구성과 정비편의성을 높였고, 고속에서의 접지력 확보를 위해 차체 앞부분의 디자인을 바꾸고 대형 뒤 스포일러도 더했다. 대당 가격이 29만 8,000유로(약 4억5,000만 원)에 이르는 R8 LMS는 2010년형 모델이 이미 매진되어 경주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반영하고 있다.

2010-AstonMartin_Rapide_GT3-1

이와 함께 올해 뉘르부르크링 24시간 경주에는 처음으로 출전하는 독특한 차들도 섞여 있어 눈길을 끈다. 우선 영국 애스턴 마틴이 최근 출시한 라피드(Rapide)는 이런 종류의 경주에는 보기 드문 4도어 모델이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라피드는 첫 고객 인도가 4월 말에 이루어지는 최신 모델인데, 신차 출시 때마다 홍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이 경주에 출전하고 있는 애스턴 마틴이 다시 한 번 소비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다. 이 차 역시 내구 경주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 개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이 일반 판매용 모델과 같은 상태의 차로 출전한다. 라피드의 뉘르부르크링 24시간 경주 도전에는 특별히 애스턴 마틴 본사의 기술진이 팀을 구성해 출전할 계획인데, 4명이 교대로 운전하는 선수 가운데에는 애스턴 마틴 CEO인 울리히 베츠도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2010-Lexus_LFA_Nuer-1

또한 렉서스의 첫 수퍼카 LFA도 시판 후 처음으로 세계적인 규모의 경주에 도전한다. 렉서스는 계획된 생산대수 500대 가운데 특별히 뉘르부르크링 경주 출전차 인증을 위해 50대를 경주차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경주차 버전은 일반 도로주행용 버전보다 엔진 출력을 10마력 높여 최고출력이 570마력에 이르고, 차체 둘레에 고속 접지력을 높이는 스포일러를 더하는 한편 주행특성을 한층 탄탄하게 다듬었다. 이미 개발과정에서도 뉘르부르크링을 테스트 코스로 활용했기 때문에, 렉서스는 LFA의 뉘르부르크링 경주 출전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아울러 렉서스는 50대 생산되는 LFA 뉘르부르크링 버전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1년간 자유롭게 뉘르부르크링 서킷을 달릴 수 있는 드라이빙 패스를 주고, 개인적인 드라이빙 강습도 해 준다고 한다.

2010-Mercedes-Benz_SLS_AMG_GT3-1

한편 메르세데스-벤츠는 내년 시즌 GT3 경주에 출전할 차를 미리 선보여 고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최근 소개된 SLS AMG GT3는 그동안 전문 경주팀이 아닌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경주차 개발, 생산과 판매를 한 적이 없었던 메르세데스-벤츠의 고성능 브랜드 AMG의 첫 시도다. 한정 생산되는 SLS AMG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경주차도 다른 GT3 경주차와 마찬가지로 경주차 규정에 맞게 일부분만 교체 및 개조되었는데, 안전장비로 사고 때 운전자의 목뼈 손상을 최소화하는 HANS 시스템을 단 것이 특징이다. 이 장치는 F1이나 인디(Indy) 시리즈, 나스카와 같은 초고속 경주차에 필수적인 것으로, 운전자의 헬멧과 시트를 연결해 충격에도 머리가 심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돕는다.

아직 모터스포츠 저변이 좁은 국내에서는 이들처럼 서킷을 달리는 럭셔리 카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경제 수준이 하루빨리 높아져서,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모터스포츠로 시원하게 날려 버리는 멋진 CEO들의 모습을 조만간 우리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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