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터트렌드 한국판 2010년 6월호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

자칭 ‘나무늘보 과’인 필자는 천성이 느린, 좋게 말하면 여유작작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게을러터진 사람이다. 그렇다고 평소 운전을 느릿느릿 하는 것은 아니지만(관점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느리게 달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그 자체를 즐기려고 애를 쓴다. 속도를 낼수록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오프로드 코스라면 특히 그렇다. 

오프로드는 말 그대로 길을 벗어난다는 뜻. 넓은 범위로 보면 비포장도로도 엄연한 길이기 때문에 ‘없는 길을 만드는 일’이 순수한 개념의 오프로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도 되면 오프로딩은 위험을 동반하는 모험이나 탐험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오프로딩이라 하면 대개 ‘포장도로를 벗어나 달리는 것’을 뜻한다. 바위를 타고 넘는 락 크롤링(rock crawling)같은 익스트림 스포츠와 언뜻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비포장 도로 주행 모두 오프로딩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오프로딩의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된 계기는 6년 전 가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짚 어드벤처였다. 어드벤처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없는 길을 만드는 진짜 모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양한 상황을 고루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짜여진 비포장 길은 배웠던 오프로드 관련 지식들을 모조리 동원해야 통과할 수 있었다. 정글 속은 거의 전쟁터. 우리나라에서도 물려보지 않은 거머리에게 물려보지 않나, 10여분 남짓 쏟아진 열대성 폭우에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버린 숲 속에서 털끝만한 접지력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질 않나. 빠져나오는 데에 반나절은 족히 걸린 코스는 나중에 돌아보니 기껏 몇 km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차 안, 그리고 차 밖에서 온 몸과 머리를 모두 써야 하는 진짜 오프로딩이 주는 즐거움은 사실 사람과 함께 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험한 지형에서 운전자가 코드라이버의 수신호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수시로 생기고, 언제 차가 뒤집히고 구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열에 속한 차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 정글 체험을 진하게 했다는 것도 만족스러웠지만, 전쟁터 같은 환경 속에서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함께 부대끼며 애쓰는 과정. 그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친밀감과 동료의식은 서킷이나 고속도로에서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외로운 달리기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 후로 한동안 SUV로 포장도로를 벗어날 일도 없었고, 그보다 타이어에 흙을 묻힐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탓에 오프로딩의 즐거움은 그저 잊혀진 기억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모터트렌드 K 에디터에게 지나가듯 ‘경치 좋은 곳에 가 보지 못한 오프로드 코스가 있는데…’라고 던진 말이 씨가 되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오프로더를 타고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달릴 기회가 생겼다. 게다가 동행한 박규철 편집위원은 10여 년 전 오프로딩의 기본기를 필자에게 전수해 준 스승이기도 하다. 서둘러 잡힌 스케줄에 준비가 미흡하기는 했어도, 한동안 서먹했던 사람들과 친밀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마련된 차는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4 TDV6, 짚 그랜드 체로키 3.0 CRD, 그리고 미쓰비시 파제로. 영국과 미국, 일본을 대표하는 정통 SUV인 세 차 모두 내로라할 오프로더들이지만 한계는 있었다. 세 차 모두 본격 오프로딩에 필수적인 오프로드 전용 타이어를 갖추지는 않은 것. 그나마 파제로의 것만 트레드 패턴이 오프로드에 조금 더 어울리는 특성을 갖췄을 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포장도로 중심으로 만들어진 타이어들이다. 하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들이 찾아갈 곳은 아주 험한 코스는 아닐 테니까.

급하게 추진된 1박2일 일정에 딱히 정해놓은 코스는 없었다. 다만 강원도 정선의 경치가 그리워 일단 그 쪽으로 움직이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세 차가 가장 먼저 발을 멈춘 곳은 동강 언저리. 막 솟아오른 신록이 수묵화 병풍처럼 펼쳐진 절벽을 수놓은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달리던 일행은 사막을 연상케 하는 모래 언덕을 발견하고 기꺼이 뛰어들었다. 바닷가가 아닌 내륙에서 이런 모래밭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 물기가 많이 빠져 발이 쉽게 미끄러지는 부드러운 모래지만 세 차 모두 들어갔다가 무리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산 속은 해가 일찍 지는 법. 높은 산줄기 뒤로 해가 숨기 시작할 무렵에 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1.5km 남짓한 비포장 길로 들어섰다. ‘짚차가 아니면 갈 수 없다’고 말만 들어왔던 길인데, 정말 SUV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길이다. 사람 머리통만한 돌이 잔뜩 깔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른 무릎 위로 올라올 정도로 제법 깊은 물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도하는 원래 사람이 앞서 가면서 물의 깊이를 살펴 차의 진행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차들이 다녀 바닥이 다져진 상태라고 판단하고 디스커버리 4부터 머리를 들이밀었다. 차고를 높였어도 물이 머플러가 잠길 정도의 깊이로 흘러, 배기구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회전수를 높여 꾸준히 진행해 나간다. 무사히 건넌 디스커버리 4를 본  파제로와 그랜드 체로키가 뒤를 따른다. 차고 조절은 되지 않는 차들이지만 물을 건너는 데에는 무리가 없고, 촬영을 위해 몇 번씩 물을 건너갔다 돌아오면서 바닥이 조금씩 파이지만 차들은 여전히 쉽게 물살을 가른다. 다른 차들이 움직이는 동안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정선 산골의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주변의 절경에 감탄한다. 한참을 힘들여 걷지 않는다면 이런 경치를 즐기며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은 SUV를 타고 오는 것뿐이다.

정선 근교의 펜션에서 1박을 한 후 다시 주변의 오프로드를 찾았다. 우선 오프로드를 즐기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덕산기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끊기는 곳부터는 계곡의 물 없는 부분을 밟으며 상류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 상류에 있는 민가를 오가는 차들로 제법 단단히 다져진 돌길은 경사나 굴곡이 험하지 않아 어느 정도 속도를 낼 수도 있다. 수시로 물을 치고 지나가야 하는 계곡 길은 더운 여름철에 즐거움이 더할 것이다. 다져진 돌 위를 달린다 해도 엄연히 물이 흐르는 계곡인 만큼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간간이 아찔한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물론 아찔한 순간을 극복해 나가는 것도 오프로딩의 즐거움을 더하는 요소 중 하나다. 모터트렌드 K 에디터 역시 이번 여정에서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 하나를 만들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밟은 코스는 산줄기 하나를 타고 넘는 비포장 임도. 처음에는 비교적 완만했던 경사는 산골짜기가 깊어지면서 점점 급해진다. 꽤 깊은 골짜기라 경사가 만만찮은데도 구석구석 사람이 일군 밭이 펼쳐진 것이 신기하다. 해발 고도가 높아지면서 밭이 사라질 무렵에 주변의 나무들이 온통 침엽수로 변한 것도 느낄 수 있다. 산꼭대기를 향해 비교적 곧게 뻗었던 길도 경사를 이기지 못해 이리저리 비틀리기 시작한다. 노면은 비교적 고른 편이어도 급한 굽이 때문에 속도를 내기는 쉽지 않다. 산 아래와는 달리 정상 부근은 이제야 꽃이 만발하다.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을 뚫고 느릿느릿 기어오른 차들은 겨우 이름 모를 고개 꼭대기에 올라선다. 고개를 돌리니 출발했던 산 밑자락은 까마득하고 시선을 올리니 태백산맥 한 줄기의 웅장한 스카이라인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차로 즐기는 등산의 절정이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이라는 점은 일반 도로를 달리는 것과 오프로딩이 같다. 다만 그 과정에서 들이는 노력과 시간은 하늘과 땅 차이다. 차가 빠르게 움직일수록 운전자의 시야는 좁아지고, 느리게 움직일수록 시야는 넓어진다. 차의 움직임이 느리면 느릴수록 느낄 수 있는 감각의 깊이는 점점 더 깊어진다. 오프로딩의 한 가지 묘미는 여기에서 온다. 주변의 사물, 특히 자연을 더 가까이에서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돌 하나, 노면의 작은 굴곡 하나도 몸으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일상적인 도시생활에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감각이 풍부해지는 경험을 오프로딩에서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묘미가 있다. 느리게 즐기는 자연이 주는 풍부한 감각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은 깊어진다. 차 좋아하는 남자들 사이에 오가는 격언 중에 ‘여자를 꼬시려면 스포츠카를 태우거나 오프로드를 데려가라’는 말이 있다. 오프로드에서의 거친 흔들림은 적당한 흥분으로 이어져 감정을 키우고, 키워진 감정은 쉽게 교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꼭 남녀 관계가 아니더라도, 오프로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들기에 제격이다. 그래서 나는 오프로딩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