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8월 Carmily에 기고한 글에서 발췌해 정리한 글입니다. ]

흔히 SUV(Sport Utility Vehicle)라고 불리는 4륜구동차는 오랫동안 험로주행에 초점을 맞추어 개발되어 왔다. 이것은 레인지로버가 처음 개발되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시에는 SUV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역시 4륜구동차의 개념을 정립한 차들 때문이었다. 오리지널 짚이 만든 4륜구동차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고, 짚의 개념을 적잖이 이어받은 랜드로버의 명성도 탄탄했다. 자동차 문화 및 시장의 발달과 더불어, 이들과 비슷한 능력을 가지면서도 스테이션 왜건의 형식을 빌린 차체로 탑승공간과 실내공간을 비교적 넉넉하게 갖춘 차들이 등장하면서 이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등장하기 시작한 용어가 SUV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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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 왜고니어(Jeep Wagoneer), 포드 브롱코(Ford Bronco),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스카웃(International Harvester Scout)처럼 미국에서 등장한 초기 SUV들은 오리지널 짚과 랜드로버보다는 실용성이 돋보였지만 여전히 험로주행능력이 강조되었다. 특히 이들은 경 트럭 섀시를 기초로 만들어 승용차의 쾌적하고 안정감 있는 주행특성과 승차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험로는 마음껏 주파할 수 있었지만 포장도로를 편안하게 달릴 수 있는 차는 아니었던 것이다. 점차 확대되고 있는 SUV 시장을 본 로버는 여기에서 새로운 틈새시장을 발견했다. 결국 시리즈(Series) 랜드로버라는 별칭을 얻었던 오리지널 랜드로버로 극한의 험로를 달릴 수 있는 차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로버는 포장도로와 험로 모두를 편안하게 달릴 수 있는 새로운 장르의 차를 만들어내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의 SUV가 갖지 못했던, 승용차에 가까운 포장도로 주행특성을 얻기 위해 로버는 시작부터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을 했다. 새 차 개발을 랜드로버 개발팀이 아닌 로버의 승용차 개발팀이 주도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오리지널 랜드로버의 개념과 철학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레인지로버의 개발을 책임진 찰스 스펜서 킹은 로버의 기술책임자이기도 했지만, 오리지널 랜드로버를 개발했던 윌크스 형제의 조카이기도 했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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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휘로 만들어진 첫 레인지로버는 오리지널 랜드로버가 줄곧 그랬듯 알루미늄 차체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경 트럭 섀시를 활용해 만들어졌던 당시 대부분의 SUV들과 격을 달리하는 돋보이는 설계가 반영되었다. 험로주행과 무게를 버티는 능력에 초점을 맞춰 판 스프링이 쓰였던 다른 차들과 달리 레인지로버에는 네 바퀴에 연결된 서스펜션에 모두 코일 스프링이 쓰였다. 물론 오프로드 주행 때 차체손상을 줄이고 타이어의 접지력을 높이기 위해 서스펜션의 상하 움직임은 매우 크게 만들어졌다. 또한 포장도로 주행 때의 제동력을 높이기 위해 네 바퀴의 브레이크도 모두 디스크 방식으로 만들었다.

1970년 2도어 모델의 모습으로 첫 선을 보인 레인지로버는 단순하면서도 강인한 디자인이 돋보였다. 당시 최신 유행이라 할 수 있었던 직선 위주의 차체 디자인은 기능적인 측면이 강조되었지만 균형미도 갖추었다. 특히 첫 레인지로버의 여러 디자인 요소들은 이후 레인지로버가 진화하면서도 고스란히 보존되는 상징적 요소들로 남게 된다. 높이 앉는 운전석에서 외부 지형을 잘 확인할 수 있도록 지붕과 차체를 잇는 필러 두께를 얇게 해 유리창 면적을 최대한 넓혔고, 차체 앞쪽 구석의 거리를 쉽게 가늠하도록 보닛 양쪽 끝을 돌출시켰다. 알루미늄 차체를 만드는 데 프레스 기술의 한계 때문에 깔끔하지 못했던 D 필러 부분에는 검은색 커버가 씌워져 마치 지붕이 떠 있는 듯한 분위기를 냈다. 이것은 이후로 레인지로버의 고유한 이미지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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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에서 공급받은 V8 3.5L 엔진에 4단 수동변속기를 갖춘 이 차는 승차감과 성능에서 승용차에 가까운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오리지널 랜드로버에 맞먹는 험로주파능력도 갖추었다. 또한 값도 당시 로버가 만들던 고급 세단과 비슷한 수준으로 책정되었다. 원래 군 장교, 건설현장 책임자, 부유한 농업인을 레인지로버의 주 목표고객으로 삼았던 랜드로버는 처음에는 이런 고가정책이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이내 영국 왕실을 비롯해 예상치 못했던 다양한 고객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고민은 입증된 레인지로버의 상품성을 고객들의 요구에 맞춰 고급스럽게 업그레이드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본격적인 럭셔리 SUV로서의 진화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