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터트렌드 한국판 2011년 3월호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

지프 랭글러는 늘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왔다.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자동차의 본질에 충실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만큼 랭글러는 험한 환경을 극복하고 달릴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는 최고였다. 차도남이 대세인 이 세상에, 묵묵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세상에 도전하는 남자의 모습.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면이 있지만, 그런 모습은 여전히 남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랭글러는 필자에게 항상 솔직한 차였고, 그래서 멋진 차였다. 한 때의 방황 끝에 오리지널 지프를 현대적으로 잘 재현한 지금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모든 면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특히 부실한 실내는 이전 세대에 비해 많은 부분이 알차졌음에도, 당당한 겉모습과는 달리 앙상한 뼈다귀처럼 아무 감성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좋은 점은 살리고 나쁜 점은 개선하는 것이 발전이다. 2011년형 랭글러를 보며 지프가 단순한 변화가 아닌 발전을 이뤄냈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아쉬운 부분들이 뚜렷하게 좋아진 실내 때문이다. 기본적인 틀과 장비구성은 거의 그대로이지만, 대시보드와 도어 트림, 센터 콘솔까지 완전히 달라져 오프로더다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운전석에 앉으니 대시보드와 그 주변에 짚 로고가 7개나 박혀 있다. 동반석 앞 대시보드 손잡이에 새겨진 ‘SINCE 1941’이라는 글귀에서도 그렇듯, 이제는 짚이 자랑할 만한 브랜드임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금속 느낌의 장식을 넣고 도어와 센터 페시아 아래의 수납공간을 그물망으로 처리한 것도 건강미와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가죽이 씌워진 스티어링 휠은 치장과 기능의 차이만 빼면 신형 그랜드 체로키의 것과 같다. 한층 굵어진 림은 쥐는 맛이 꽤 좋다. 투박한 디자인의 기어 레버 역시 단순하면서도 손에 쥐기 좋은 모양으로 바뀌었다. 스위치류의 위치를 손본 것만으로도 랭글러의 정체성은 더욱 뚜렷해졌다. 대시보드 왼쪽 아래로 자리를 옮긴 스웨이바 분리/체결 기능과 트루 록(Tru-Lok) 앞뒤 디퍼렌셜 잠금 기능 스위치 옆에는 큼지막하게 ‘오프로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두 버튼이 옮겨간 자리는 ESC 스위치와 ESC가 업그레이드되며 추가된 자동 내리막 속도조절 기능 스위치가 차지했다. 

애리조나 사막 한 가운데나 보르네오 섬 열대 우림지대에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랭글러의 굿이어 랭글러 타이어가 평생을 비비게 될 곳은 지면이 아닌 노면일 확률이 거의 90%다. 포장도로에서의 주행느낌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티어링, 승차감, 핸들링, 제동 느낌 모두 정직하기 짝이 없다. 랭글러에 감동하는 이유는 그런 정직함을 편안하게 풀어내는 데 있다. 승차감과 핸들링은 도시 생활에 충분히 적응한 듯 든든하고 차분하다. 요철에서 통통 튀기는 느낌과 많이 돌출된 오버 펜더가 주차할 때 신경 쓰이는 점만 빼면, 차체 길이가 웬만한 소형 해치백 정도밖에 되지 않는 차를 도시에서 몰기에 불편할 까닭이 없다. 

공회전 때 대시보드를 뚫고 들어오는 엔진의 가르랑거리는 소리는 여전하지만, 전반적인 소음은 꽤 줄었다. 물론 실내에서는 여전히 타이어와 노면, 바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도 귀로 들어오는 소리의 양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이전 모델과의 차이는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면 드러난다. 랭글러에서 시속 130km를 넘겨서도 부담 없이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전에 없던 호사다. 랭글러는 원래 처음부터 차에 탄 사람을 자연과 한 몸으로 만드는 차였다. 귀에 거슬리는 느낌은 아스팔트 위를 달릴 때뿐이다.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면 금세 흙과 자갈, 풀들이 고개를 숙이는 소리에 마음을 푸근해진다.

2.8L CRD 엔진은 이전 모델의 것을 손보았다. 출력과 토크, 연비 모두 좋아졌다. 최고출력 200마력, 최대토크 46.9kg·m라는 수치는 동급에서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 초반의 더딘 액셀러레이터 반응은 페달 유격에 의한 것이다. 페달을 조금 깊게 밞으면 엔진은 끼었던 팔짱을 풀고 힘차게 토크를 쏟아낸다. 일말의 아쉬움은 진동을 거르는 방식이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반응에 대한 것이다. 조만간 피아트 기술이 반영된 새 엔진이 랭글러에 들어간다면 그런 아쉬움은 과거의 일이 될 지도 모르겠다.

5단 자동변속기에는 수동 기능이 더해졌다. D 모드에서 기어 레버를 좌우로 움직여 조절하는 크라이슬러 특유의 오토스틱 방식이다. 랭글러의 자동변속기는 수동보다 더 섬세하게 페달을 조작해야 한다. 액셀러레이터의 초기 반응이 더디기 때문에 조작이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다행히 디젤 엔진의 높은 토크와 극단적으로 낮은 저속 기어비는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어도 슬금슬금 랭글러를 전진하게 만든다.

시승을 위해 찾은 오프로드는 랭글러의 능력을 100% 확인하기에 충분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기어 레버 오른쪽에 마련된 록 트랙 트랜스퍼 기어 레버는 기계를 다룬다는 느낌을 확실히 전달한다. 조금 뻑뻑한 레버만 제 자리를 찾으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운전하는 사람은 아찔할 경사와 굴곡을 맞닥뜨려도, 액슬 록 스위치로 앞뒤 디퍼렌셜을 잠그고 스웨이바를 해제하고 나면 말 그대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아무렇지 않게 험로를 통과한다. 랭글러는 이 맛에 타는 거다. 값 비싼 전자장비를 아무리 쏟아 부어 봐야 순수한 기계만큼 확실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솔직하기 짝이 없는 랭글러의 가치는 그래서 더 소중하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가장 믿음직한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승 중 평균 연비는 9km/L 정도. 국내 공인연비인 10.7km/L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정체가 심한 도심주행도 많았고 오랜 시간 오프로드를 달린 것을 감안하면 그리 나쁘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곳을 달리더라도 연비에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오프로드 주행을 고려해 원체 낮게 설정된 기어비를 생각하면 평가는 ‘훌륭하다’쪽으로 기울게 된다.

겉모습은 거의 바뀌지 않았지만, 원래 멋있었던 랭글러는 훨씬 더 멋있어졌다. 묵묵히 자신의 능력이 펼쳐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던 이전의 랭글러가 아니다. 새 랭글러는 자연 속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확인할 수 없는 타고난 능력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타는 이에게 호소한다. 언제나 불편함으로 시작되었던 랭글러와의 만남은 헤어지기 싫은 절박함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이번 랭글러는 그 절박함이 발을 동동 구르게 할 정도다. 이 애절한 마음이 식기 전에 은행 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