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Acura NSX

[ 에스콰이어 2011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F1 챔피언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레이서들이 개발에 참여. 독일 뉘르부르크링 노르드쉴라이페를 비롯한 세계적 서킷을 달리며 섀시를 튜닝. 티타늄 커넥팅 로드와 단조 피스톤 등 고성능 부품을 대폭 적용한 고회전 엔진 탑재. 차체 구조와 보디, 서스펜션을 모두 경량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2도어 2인승 미드십 쿠페.

지금까지 쓴 내용은 최신 스포츠카를 설명하기 위해 나열한 문장이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무려 20여 년 전에 출시되었고 단종된 지 5년도 넘은 차다. 등장과 함께 자동차 업계와 시장에 모두 충격을 안겨준 그 차의 이름은 혼다 NSX다.

NSX가 등장할 무렵인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는 문자 그대로 일본차의 황금기였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10여 년 동안, 일본 메이커들은 대단한 기술과 세련된 디자인을 갖춘 멋진 제품을 줄기차게 쏟아냈다. 지금도 스포츠카 마니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도요타 수프라, 마쓰다 RX-7 같은 차들만 봐도 그렇다. 혼다 시빅이나 도요타 코롤라 같은 차들은 그 값에 살 수 있는 차들 가운데에서도 스타일과 성능, 꾸밈새에서 따라올 차가 없었다. 하지만 권불십년. 딱 거기까지였다.

요즘 일본차를 보면 그 시절에 나왔던 놀라운 차와 기술, 그리고 도전적인 면모는 찾기 힘들다. 하이브리드카인 도요타 프리우스로 정점을 찍은 후, 일본 메이커가 지금까지 내놓은 차들 가운데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상큼한 차는 찾기 힘들다. 기껏 꼽아봐야 실용적인 전기차 시장을 개척했다고 하는 미쓰비시 i-MiEV와 닛산 리프 정도이지만, 이들은 아직 주류라고 보기는 미숙한 점이 많다. 그리고 일본 제1의 메이커인 도요타가 요즘 하고 있는 일은 전통 있는 유럽 메이커들이 가꿔놓은 시장을 쫓아다니는 것과 ‘프리우스에 무슨 껍데기를 씌우면 좋을까?’에 골몰하고 있는 것뿐인 듯하다. 프리우스의 뚜껑을 따도, 렉서스 CT200h의 뚜껑을 따도 들어있는 내용물은 별다를 것이 없는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국내에서 일본차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제도와 규제, 시장여건 때문에 국내에 들여와 팔 수 있는 차에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차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개성이나 가치를 지닌 차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국내에서 살 수 있는 차들은 대부분 해외 시장, 특히 미국에서 국산차와 직접 경쟁을 하는 차들이다. 도요타 캠리나 혼다 어코드, 닛산 알티마 같은 차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차들은 수입차라서 값은 비싸지만 현대 쏘나타, 기아 K5 같은 차들과 비교하면 꾸밈새는 별 차이가 없고 각종 장비수준은 오히려 떨어진다. 상품가치만 놓고 보면 굳이 일본 브랜드 엠블럼을 단 4도어 세단을 살 필요가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일본차가 아주 안 팔리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일본차를 사는 이유는 간단히 말해 국산차에 크게 데었거나 그냥 싫으면서 더 비싼 프리미엄 브랜드 수입차는 부담스러워서다.

지금까지 일본차가 세계 시장에서 성장하고 살아남은 이유는 소비자들이 일본차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일본차의 가치는 값에 비해 높은 품질, 내구성, 경제성에 있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면 1990년대 일본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던 첨단 전자장비를 들 수 있다. 도요타가 요즘 먹고 살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인 하이브리드 기술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일본차에 쓰이는 전자장비라면 국내 브랜드를 비롯해 웬만한 차들에는 거의 다 달려 나오고 있다. 고유가와 경제위기로 전 세계 메이커들이 연비향상에 매달린 결과, 경제성 때문에 굳이 일본차를 살 필요는 없게 되었다. 특히 연료비를 생각하면 일제 하이브리드카보다 유럽산 디젤 승용차가 더 현실적인 매력이 크다.

이런 보편적인 가치에서 매력이 떨어진다면 다른 것으로는 보완이 될 수 있을까? 요즘 BMW 차를 타 보면 그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부드럽고 조용하기는 렉서스가 부럽지 않을 정도이면서 전통적인 BMW의 달리기 특성은 이전보다 더 깔끔하고 강렬해졌다. 메르세데스-벤츠나 아우디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기술 면에서는 독일차, 스타일 면에서는 프랑스차, 안전 면에서는 스웨덴차, 품격 면에서는 영국차의 강점이 돋보인다. 모두 각자의 개성은 발전적으로 이어나가면서도 품질, 내구성, 경제성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특징들은 새롭게 더하고 있다. 마치 ‘그 길이 아닌 것 같아서 가지 않은 것뿐이지, 갈 줄 몰라서 못 간 게 아니야’라고 차를 통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10여 년의 황금기를 거치며 정말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차에 열광하는지에 대해 심사숙고 했다면 지금처럼 일본차들이 재미와 매력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일본 메이커들은 ‘갈 데까지 다 가봤고, 경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으니 이제는 수익성을 높이자’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고, 잘 팔리는 차에 집중해 원가를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전력했다. 하지만 소비자가 제품을 외면하면 아무리 수익성 높은 제품을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소비의 기본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로 설명된다. 소비자의 지갑에서 나온 돈에 알맞은, 나아가 지불하는 값을 웃도는 가치가 담겨 있는 물건이 소비되는 것이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소비자가 그렇다고 믿을 수 있어야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같은 독일 프리미엄 메이커들이라고 수익성 향상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들과 일본 메이커들의 차이가 있다면,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하는 차’라는 인식을 소비자들에게 심기 위한 노력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목표는 하나다. 자신들이 만드는 차를 ‘누구나 사고 싶은 차’로 만드는 것이다.

맥 빠진 요즘 일본차가 과연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일본 메이커에게 가장 중요한 시장과 소비자인 일본과 일본 소비자들이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 내수 시장은 성장을 멈춘 지 오래다. 지금 일본 자동차 시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경차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이어지고 있는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는 정말 필요한 사람들만 차를 사도록 만들었다. 이런 시장을 위한 차를 만들면서 더 이상의 가치, 꿈과 이상을 자극해 정말 손에 넣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차를 생각해내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일본 밖의 소비자들이 바라는 새로운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제품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혼다 NSX는 슈퍼카의 성능을 내면서도 일상적으로 쓰기에도 편리한 차를 만들겠다는 꿈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등장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물론 NSX도 한계는 있었다. 현실적인 드림카로 사람들의 꿈을 자극하기는 했지만,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NSX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차 중 하나로 손꼽힌다. 누가 뭐래도 멋진 생각으로 만든 멋진 차였기 때문이다.

아직 혼다는 NSX의 뒤를 이을 스포츠카를 선뜻 내놓지 못하고 있다. 조만간 나오기는 하겠지만, 과연 NSX를 뛰어넘는 가치를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누구나 사고 싶을 정도로 매력과 가치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차로 성공을 거둔다면 그 후로 나올 일본차들에게는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이다. 제발 20년 전 혼다 NSX처럼 멋진 이상을 현실로 구현한 차, 그러면서도 조금만 애쓰면 손에 닿을 수 있는 차를 내놓으라는 말이다. 그래야 사람들의 입에서 ‘나 그 차 꼭 사고 싶어!’, ‘이 맛에 일본차를 산다니까!’라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