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생활 2000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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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해도 요즘의 전세계 자동차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미국이다. 단일시장으로서는 거의 세계 최대규모일 뿐 아니라, 다른 지역들이 경제적 타격에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에도 이어지는 호황으로 멀쩡하게 시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 메이커들의 제품 트렌드도 시장흐름을 따르기 마련이라 미국시장에 맞는 차들이 전세계를 휩쓰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큰 시장에는 거물들도 끼어있기 마련이다. 미국시장에서 장사가 잘 되니 제법 큰 메이커들은 미국에 현지공장을 세우기 바쁘다. BMW가 스포츠카 시장호황에 때맞춰 Z3 로드스터 생산공장을 미국 스파탄버그에 세운데 이어, 메르세데스 벤츠도 SUV 붐이 일어나는 미국에 크라이슬러 합병과 함께 본격적으로 생산공장을 진출시켰다.

그동안 메르세데스는 G 바겐으로 오프로드 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다임러-슈타이어-푸흐에서 생산하는 G 바겐은 독일에서는 군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기능성을 충실하게 살려 고급 오프로더로서 인정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79년 데뷔 이후 너무 오랜 세월을 같은 모습으로 생산되어 요즘의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다. 이에 대한 메르세데스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M 클래스인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는 M 클래스는 지극히 평범하다. 두툼한 범퍼를 비롯, 전체적으로 둥글면서도 큰 덩어리가 모여있는 단순한 디자인이 깔끔해 보인다. 메르세데스 엠블럼을 떼어놓는다면 어느 회사 차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중형 이상급 승용차들과는 달리 소형급인 A 클래스와 비슷한 인상을 지녀 제법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컴팩트하다는 느낌을 준다.

엔진룸 구경을 하려고 운전석 아래쪽의 레버를 당겼는데, 막상 차 밖으로 나가 ‘뚜껑따개’를 찾으니 도무지 눈에 뜨이질 않았다. 한참을 뒤지다가 진행기자님이 겨우 찾아낸 ‘따개’는 그릴 가운데의 벤츠 세꼭지 별 밑에 숨어있었다. 그런 곳에 숨겨놓으니 찾기가 어렵지… 하여튼 ‘뽕’ 하고 보네트를 여니 심플한 엔진룸이 눈앞에 펼쳐졌다. 

두 개의 댐퍼가 양쪽을 받치는 구조는 뉴 코란도에서도 보았던 방식. 특이하게 냉각수통이 엔진 위쪽에 달려있다. 가운데 세로로 놓여있는 18밸브 V6 3.2리터 유닛은 무쏘나 체어맨에 얹혔던 직렬 6기통의 다음세대 엔진이다. 엔진룸은 더 큰 엔진이 들어갈 것을 고려하여 전반적으로 여유있는 편이다. 고성능 버전인 AMG ML 55의 경우 5천 500cc 엔진이 들어간다.

메르세데스 답지않게 배선은 약간 엉성해 보인다. 물론 메르세데스 답지않다는 것 뿐이지 ‘우에엑~ 이게 뭐야’할 정도로 심하다는 뜻은 아니다. 비교적 높이 위치한 에어 인테이크는 어느 정도 물길주행도 염두에 둔 배려다. 꼼꼼히 살펴보다 보니 범퍼 바로 뒤에서 강철 바를 발견했다. 차체 비틀림을 막고 충돌시 충격을 줄이기 위한 배려다. 메르세데스 다운 안전구조다.

M-Klasse

겉모습과는 달리 실내는 메르세데스 특유의 점잖은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다. 가죽시트를 비롯한 내장재는 허리 아래로는 모조리 검은색이다. 시트는 3열의 7인승 구성이지만 시승차는 적재공간을 넓히기 위해 3열 좌석을 떼어놓은 상태였다. 

운전석과 조수석은 3명까지 메모리가 가능한 전동식 조절장치가 달려있다. 좌석이 높은 탓에 팔을 뻗어 조절하기가 애매한 점도 느낄 수 있다. ‘원숭이 팔’이라는 놀림까지 받는 필자가 ‘애매하다’고 느낀다면… 하긴 필자는 팔만 긴 것이 아니라 허리도 길기 때문에 일반체형의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좌석에 앉았을 때의 느낌은 편안함 그 자체다. 자세도 어색하지 않고, 몸을 감싸주는 느낌이 부드럽다. 다만 몸을 제대로 잡아주지 않아 오프로드 주행에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좌석배치가 다양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 중의 하나다. 6:4 비율로 나뉘어 접히는 2열 시트는 3열 좌석에 오르내리기 쉽게 되어있지만 이 때문에 2열 전체를 완전히 접어 평평하게 할 수가 없다. 친절하게 시트 접는 법에 대한 설명이 차체에 붙어있지만 무거운 시트는 생각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2열 좌석도 성인 3명이 타기에는 조금 비좁게 느껴진다. 

편의장비는 승용차 스타일이다. 필요한 최소한의 수납공간들만 갖추어져 있다. SUV라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주렁주렁 매달린 컵 홀더라든가 곳곳에 마련된 수납공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SUV라지만 Sport는 몰라도 Utility라는 이름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스티어링 휠 뒤쪽에 달려있는 라이트/와이퍼 조절 컬럼스위치는 큼지막하게 튀어나와있어 다루기가 편리하다. 3열 좌석 옆으로 난 창은 센터 페시아 아랫부분의 버튼으로 여닫을 수 있게 되어있다. 3열 창문 개폐 스위치 옆에는 시트 히팅 버튼이 나란히 달려있다.

센터 페시아에서 좌석 옆의 센터 콘솔에 이르기까지 20여개의 다양한 버튼들이 말 그대로 널려있다. 오디오는 메르세데스 순정 오디오인데, 이것도 다기능 버튼들을 몰아놓은 모양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쉽게 알아보기가 힘들다. 메르세데스는 전통적(?)으로 다양한 전자장비들을 적극적으로 많이 사용하기는 하지만 운전자가 배우고 익히는데 시간이 제법 걸리게 해 놓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크루즈 컨트롤 레버와 트립 컴퓨터다. 크루즈 컨트롤 레버는 라이트 조절 컬럼 스위치 위쪽에 삐죽 튀어나와있어 깜빡이를 켜려고 왼손을 움직이다가 잘못 건드리기 십상이다. 트립 컴퓨터는 룸미러 앞쪽에 운전자 얼굴쪽으로 LCD 화면이 자그마한 버튼들과 함께 달려있다. 

우리나라같은 도로환경에서 크루즈 컨트롤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쳐도, 트립 컴퓨터는 아무리 버튼을 눌러봐도 나오는 내용을 2개 이상 대번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른 장비들도 이 차 저 차 골고루 많이 타 보는 필자같은 사람이야 대강 이게 무슨 장치겠거니 하고 주물럭 거리다 보면 알게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차를 구입해서 운행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생길 것 같다.

이 차에서 ‘그래 이거야!’라며 좋아했던 부분은 캔버스탑처럼 2열 좌석 위까지 활짝 열리는 라멜라 선루프였다. 지붕 부분은 방수 천 위로 여러개로 나뉘어진 플래스틱 패널이 있어 마무리도 깔끔하고 닫았을 때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개폐 버튼이 원터치식이 아니라 모두 다 열려면 꽤 오랜 시간동안 버튼을 누르고 있어야 하지만, 열어놓고 나면 아쉬울 것이 없다. 바람 좋고 하늘만 맑다면 가슴 속까지 다 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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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320의 섀시는 신세대 SUV답지 않게 사다리식 프레임에 바디를 얹은 고전적인 구성이다. 비틀림 강성은 좋아지지만 일반 모노코크 섀시보다 무거워지고 자칫 소음이 생기기 쉬운 구조다. 여기에 앞바퀴쪽은 더블 위시본 타입, 뒷바퀴 쪽은 멀티링크 타입의 서스펜션을 채용했다. 서스펜션 자체를 약간 소프트한 쪽으로 셋팅해 놓아 온로드에서의 승차감은 매우 부드럽다. 이전에 타보았던 다른 메르세데스 승용차들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과격한 몸놀림에서는 여유있게 움직여주는 차체가 항상 승객을 편안하게 해 준다. 키가 큰 탓에 약간은 불안하게도 느껴지지만 막상 급코너를 돌아도 불안함은 느낌뿐, 차는 제법 든든하게 돌아준다.

온로드에서는 승용차 못지 않은 날렵한 몸놀림을 자랑한다. 유연하고 조용한 엔진은 31.6kgm의 토크를 중고속 영역대인 3천에서 4천 8백 rpm까지 고르게 뿜어낸다. 처음에는 약간 굼뜬 듯한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 페달이 가속과 감속시에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시원스러운 가속으로 웬만한 승용차들은 금새 백미러 뒤로 날려버릴 수 있다. 높은 rpm에서 엔진음은 보다 우렁차지지만 깔끔한 방음처리로 전혀 귀에는 거슬리지 않는다. 운전자가 타면 2톤이 넘는 차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타이어는 오프로드 온로드 겸용의 제너럴 그래버 ST 255/65 R16이 끼워져있다.

기어는 메르세데스 특유의 계단식 게이트에 크라이슬러의 다른 차들과 비슷하게 쉬프트 레버를 좌우로 쳐주면 단수가 조절되는 방식을 결합한 ‘터치 쉬프트’ 방식을 채용했다. 5단 자동변속기를 얹은 이 차는 기본적으로 D 위치에 놓으면 5단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운전석 쪽으로 당기면 한 단씩 기어가 내려가는 방식이다. 변속되는 빠르기가 반 템포 아쉽게 느껴지지만 운전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풀타임 4륜구동 시스템에 전자제어 차체안정장치(ESP)가 탑재되어있어, 승용차 못지않은 주행안정성을 보장한다. 풀타임 4륜구동 시스템은 온로드에서는 물론 오프로드에서도 제 역할을 해 주는데, 파트타임 4륜구동과 같은 구동방식 변환장치가 없는 대신 험로에서는 ‘로 레인지’ 버튼을 눌러주어야 한다. 기계장치 보호와 안전을 위해 차가 완전히 정지한 상태, 그리고 기어가 N 위치에 놓여있어야만 작동하게 되어있다. 작동을 해제할 때에도 마찬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오프로더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구성들은 곳곳에서 눈에 뜨인다. 턱 없는 도어라든가, 물길주행을 고려하여 높이 자리잡은 에어 인테이크, 짧은 앞뒤 오버행과 긁혀도 신경이 덜 쓰이는 범퍼 등 구조적인 부분에서 일단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갖추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나 오프로더로써 아쉬운 것은 최저지상고가 썩 높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타고 내리기에는 편할지 몰라도 어지간한 험로에서는 밑바닥 긁히는 소리 들리지 않나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어설프게나마 험하지 않은 오프로드를 올라보았다.  스티어링 감각은 탁월하다. 여타 오프로더에서 느끼기 힘든 정갈함이 배어있다. 온로드에서는 약간 여유있게 느껴지지만 오프로드에서는 ‘딱’이다. 제법 굵고 거친 돌들이 깔린 30도 남짓한 경사를 올라가는데 바퀴가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자 즉각 ETS의 작동음이 들렸다. 로 레인지를 선택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브레이크가 부분적으로 작동하면서 ‘띵~ 띵~’하는 특유의 소리로 필요한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온로드에서의 소프트한 승차감이 오프로드에까지 이어져, 아주 험한 길만 아니라면 비교적 편안한 주행이 가능할 듯 하다.

하지만 솔직히 딱 까놓고 맘에 드는 구석은 스포티한 온로드 주행성능과 오프로드에서의 승차감 정도다. 스타일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편의장비가 다양한 것도 아니고, 적재공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군용으로도 쓰이는 G 바겐이 오프로더의 활용성을 강조해 지나치게 투박한 것이 흠이라면, ML320은 온로드 유틸리티의 기능이 강조되면서 메르세데스 특유의 여유로움이 미국식으로 헐렁헐렁하게 변질된 것이 흠이라 하겠다. 외지의 표현대로 “많은 사람이 탈 수 있고 넉넉한 공간을 가진 포르쉐”라는 평을 듣는 고성능 AMG ML 55가 아니라면 “키 큰 승용차”의 역할 외에는 큰 메리트는 없어보인다.

결론을 내리자면, 메르세데스 M 클래스는 오프로더의 탈을 씌운 E 클래스 왜건이다. 온로드 성능은 대만족이요, 오프로더로써도 별다른 손색은 없지만 과연 이 차를 끌고 오프로드를 오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프로드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가격대의 랜드로버가 더 가깝게 다가올텐데 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본다면 짐공간이 넉넉한 E 클래스 왜건도, 오프로더로서 충실한 G 바겐도 국내 소비자들의 취향에는 먹혀들기 어려울테니 M 클래스 같은 ‘틈새차종’이 어느 정도 약발이 들을 것 같기도 하다. 메르세데스 브랜드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설득력이 있으리라 본다. 그나마 값이 생각보다는 그다지 비싼 편은 아니라는 것이 불행중 다행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