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CEO 2010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자동차의 역사도 이미 한 세기를 넘어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역사 속에서 시대의 문화적 흐름과 사회적 현상을 반영해온 만큼, 자동차를 주제로 삼는 박물관도 세계 곳곳에 많이 자리하고 있다. 필자가 해외 취재를 통해 둘러 본 여러 자동차 박물관들 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독일 자동차 메이커들이 만들어 운영하는 곳들이었다. 이들 박물관은 규모와 전시 및 소장품의 풍부함에서부터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박물관이 연간 수십만 명이 방문할 정도로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이들 박물관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역시 그들의 본고장인 독일 사람들이다.

필자가 둘러본 곳은 볼프스부르크에 있는 폭스바겐의 아우토슈타트,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 잉골슈타트에 있는 아우디 포룸이었는데, 그 밖에도 최근에 BMW가 뮌헨 본사 부근에 BMW 벨트(월드)를, 포르쉐가 슈투트가르트에 박물관을 새로 단장해 열었다. 이들은 대부분 각 메이커의 새차 출고센터에 가까이 있어, 새차를 인수하기 위해 찾은 고객들이 기다리는 시간 동안 박물관을 둘러보며 자사 차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규모 면에서 가장 큰 곳은 폭스바겐의 아우토슈타트다. 이곳은 단순한 자동차 박물관이라기보다 테마파크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린다. 폭스바겐은 생산규모 면에서 독일 자동차 메이커 가운데 가장 크고, 거느리고 있는 브랜드도 다양하다. 이런 회사의 규모를 반영하듯 아우토슈타트에는 폭스바겐 산하 브랜드별로 별도의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즉 핵심 브랜드인 폭스바겐 뿐 아니라 아우디,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슈코다, 세아트 브랜드의 전시관이 모두 모여 있다. 여기에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최신 기술을 직접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체험관도 마련되어 있다. 웬만한 공원을 능가하는 넓은 면적에 펼쳐진 다양한 것들을 모두 돌아보기에는 하루가 부족할 정도. 그래서 아우토슈타트 안에는 호텔까지 있을 정도다. 2000년 개설 이후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2,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은 세계 첫 자동차를 만든 메이커에서 운영하는 만큼, 오랜 역사와 다양한 제품들을 폭넓으면서도 깊이 있게 둘러볼 수 있도록 주제별에 따라 체계적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DNA를 연상케 하는 나선형의 건물로 지어진 박물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위 층으로 올라가서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 만나게 되는 전시물이 자동차가 아닌 말이라는 점은 자동차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그 뒤로 벤츠의 첫 자동차인 파텐트 모토바겐에서 시작해 시대와 차의 성격에 따라 그동안 메르세데스-벤츠가 만들어 왔던 다양한 종류의 자동차들을 상세한 설명과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전시된 차들은 보유하고 있는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일반에게 공개하지는 않지만 박물관 지하의 자료실에는 차의 설계도를 비롯한 각종 자료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잉골슈타트의 아우디 박물관은 앞서 이야기한 다른 메이커의 박물관보다 규모가 작은데, 이는 아우디 박물관이 잉골슈타트와 네카줄름 두 곳에 나뉘어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우디가 네 개 브랜드가 합쳐져 만들어졌기 때문에, 합병 이전 브랜드들의 주 근거지를 중심으로 박물관을 세운 것이다. 아우디 박물관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자동차뿐 아니라 모터사이클도 전시되어있다는 것. 이는 아우디에 합병된 NSU가 한때 독일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모터사이클 생산에 주력한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동차 경주에 오랜 공을 들인 것을 반영하듯 전체 전시물 가운데 경주차의 비중이 높은 것도 흥미롭다. 1990년대 이후 아우디가 여러 차례 연속 우승을 차지한 바 있는 르망 24시간 경주에 출전했던 차종들이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BMW 벨트와 포르쉐 박물관도 규모와 내용 면에서 다른 메이커의 박물관에 뒤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자동차가 담고 있는 역사성과 특징을 반영할 수 있도록 유명 건축가들과 함께 건물을 설계하고, 자동차 이외의 전시물도 자동차와 각 브랜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다양하게 구성했다. 이처럼 잘 꾸며진 독일 메이커의 박물관들을 둘러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즐겁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이들 박물관을 둘러보기 위해 메이커들의 근거지에 있는 도시를 옮겨 다니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여행상품이 될 정도다.

박물관은 흔히 교육적 차원에서 생각하기 쉽다. 어린이들에게는 역사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단체로 방문한 학생들이나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여느 박물관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국내의 박물관 풍경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어림잡아 관람객의 절반이나 그 이상이 중장년층이라는 점이다. 일찌감치 자동차가 생활과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은 것을 반영하듯, 과거를 회상하며 전시된 차를 가리키고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층이나 노인들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심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자동차 만들기를 시작한 지 불과 50여 년 밖에 되지 않았고, 빠른 경제성장 와중에서도 워낙 부침이 심했기 때문에 아직 메이커들이 자체적인 박물관을 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국내에도 사설 자동차 박물관이 있지만, 접근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아직까지 자동차 문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의 뿌리가 얕아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생산규모 면에서는 우리나라가 세계적 수준에 올라섰지만, 자동차 문화는 아직 생산규모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역사와 문화적 관점에서 자동차를 바라볼 때가 됐다. 독일 자동차 메이커들의 자동차 박물관은 자동차 문화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의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