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6년에 처음 등장한 차들을 돌아보는 기사의 네 번째 조각입니다. 첫 번째(링크), 두 번째(링크), 세 번째(링크) 글에 이어, 탄생 25주년을 맞은 또 다른 다섯 모델을 하나하나 둘러보겠습니다.
#16. 페라리 550 마라넬로

페라리의 일반 도로용 V12 엔진 스포츠카는 오랫동안 앞 엔진 뒷바퀴굴림(FR) 동력계 및 구동계 구성을 유지했지만, 1973년 365 GT/4 BB ‘베를리네타 복서’의 등장 이후 한동안 명맥이 끊깁니다. 이렇게 끊어진 전통을 되살린 모델이 바로 550 마라넬로입니다.
550 마라넬로는 동력계 및 구동계 구성뿐 아니라 페라리가 양산차에 V12 실린더 구성을 다시 쓴 엔진을 올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365 GT/4 BB 이후 F512 M에 이르기까지 페라리 최상위 모델에는 수평 12기통 엔진을 썼으니까요. 550이라는 이름은 엔진 배기량이 5.5L라는 것을 뜻합니다. 아울러 뒤에 붙은 마라넬로(Maranello)라는 별칭은 페라리의 본사와 공장이 있는 마을 이름이고요. 485마력의 최고출력을 낸 V12 엔진은 2인승 정통 쿠페를 정지 상태에서 4.4초 만에 시속 100km를 넘길 수 있는 성능을 냈고, 최고속도는 시속 320km에 이르렀습니다.
550 마라넬로는 정통 GT를 지향하는 모델로, 페라리 라인업에서는 고성능과 더불어 호화로움을 상징하는 모델로 자리를 잡습니다. V12 엔진을 올린 최상위 모델이라는 상징성은 화려한 꾸밈새와 더불어 더 뚜렷해지죠. 장거리 여행을 고려해 맞춤 제작한 가방 세트도 함께 만드는 등 현대적 호화 GT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도 함께 나왔습니다. 이런 상품 구성은 지금 팔리고 있는 812 슈퍼패스트에 이르기까지 페라리 최상위 모델에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17. 포드 카

유럽 포드가 한창 ‘뉴 에지(New Edge)’ 디자인으로 새 바람을 일으키던 1990년대 중후반, 뻔하디 뻔한 차들로 가득했던 유럽 도시형 소형차 시장에 개성 있는 스타일로 승부수를 던진 모델이 카(Ka)입니다. 기술적으로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신선한 스타일과 제법 스포티한 핸들링으로 특히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죠. 이런 스타일의 소형차는 앞으로도 접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으로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카는 초기에는 원가 절감을 위해 앞뒤 모두 플라스틱 표면을 그대로 드러낸 검정색 범퍼를 썼고요. 실내 부품 구성도 단순했습니다. 이따금 색다른 꾸밈새로 일반 모델과 차별화한 한정 모델을 내놓아 신선함을 유지했고요. 차체는 3도어 해치백 한 가지만 있었지만 나중에 2인승 컨버터블인 스트리트카(StreetKa)와 스포티하게 손질한 스포트카(SportKa)도 추가되었습니다.
유럽 엔트리급 소형차들이 대부분 그렇듯, 1세대 카는 12년간 큰 변화 없이 생산되었습니다. 차 자체의 수익성이 낮은 만큼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생산하는 것이 본전을 뽑는 방법이죠. 2008년에 나온 2세대 모델은 피아트와 공동 개발하면서 스타일과 개념 모두 많이 평범해져서, 1세대 만큼 깊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18. 포드 익스페디션

1세대 익스플로러로 SUV 붐을 일으킨 포드가 여세를 몰아 한 등급 높은 모델로 1996년에 내놓은 것이 익스페디션(Expedition)입니다. 사다리꼴 프레임을 바탕으로 만든 픽업트럭에 왜건 스타일 보디를 얹는 식으로 만든 포드의 두 번째 SUV이기도 합니다. 익스플로러가 증명했듯, 큰 돈 들이지 않고 개발해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는 차를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1세대 익스페디션은 구조적으로나 기술적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었습니다. 큰 덩치에 걸맞게 V8 엔진을 기본으로 얹은 풀 사이즈 SUV라는 점을 빼면요. 레인저를 바탕으로 익스플로러를 만든 것처럼, 익스페디션은 F-150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전통은 승용차 성격이 강해진 익스플로러에서는 끊어졌지만 익스페디션에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F-150 픽업 바탕의 SUV라는 점에서는 단종된 브롱코의 혈통을 잇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브롱코와 달리 2열 좌석에 타고 내릴 수 있는 뒤 도어가 있다는 점이 차이가 있습니다. 긴 차체 덕분에 충분한 뒷좌석 공간은 물론 적재공간도 넉넉하게 갖췄고요. 스포티한 꾸밈새의 노 바운더리즈(No Boundaries) 에디션과 고급스러운 꾸밈새의 에디 바워(Eddie Bauer) 에디션도 있었습니다.
#19. 포르쉐 복스터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포르쉐에게 회생의 변곡점이 된 모델, 복스터(Boxster)가 탄생한 것이 1996년입니다. 복스터라는 이름은 엔진의 수평대향 실린더 배치를 가리키는 복서(Boxer)와 로드스터(Roadster)를 결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데뷔 초기만 해도 복스터를 ‘Boxter’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오타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996 세대 911과 더불어 986 세대 복스터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면서 포르쉐 스포츠카 라인업을 ‘지속 가능한’ 구성으로 굳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죠. 특히 복스터는 대중적 성격의 엔트리 포르쉐로서 합리적 가격과 더불어 미드 엔진 뒷바퀴굴림 동력계 및 구동계 배치로 전통과 정통성, 운전 재미를 고루 갖춘 것이 매력이었습니다. 물론 996 911과 같은 이상한(?) 모양의 헤드램프나 기본 모델의 수평대향 6기통 2.5L 엔진의 ‘적당한’ 힘, 썩 좋지 않은 정비성 등 싫은 소리 들을 만한 요소들도 있었습니다.
초반에 딸렸던 힘은 나중에 배기량을 2.7L로 키우는 한편 3.2L 엔진의 복스터 S를 추가하면서 어느 정도 보완되었죠. ‘팔아야 한다’ 그리고 ‘남겨야 한다’는 과제를 매력 있는 제품으로 풀어낸 포르쉐의 영리함을 느낄 수 있는 모델로서 분명 복스터는 포르쉐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습니다.
지금은 718 복스터로 이름이 바뀌고 4기통 터보 엔진이 주력 동력계가 되었는데요. 나중에 나온 차들보다 조금은 촉촉하게 들렸던 1세대 복스터의 매력적인 배기음은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합니다.
#20. 피아트 팔리오

팔리오는 중남미, 동구권 등 저개발 국가에서 나름 입지를 쌓고 있던 피아트가 시장 확대를 염두에 두고 전략적으로 개발한 브랜드 첫 ‘월드 카(world car)’입니다. 이름부터 뭔가 잘 팔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죠. 저개발 국가에서 피아트가 주력으로 팔던 모델들이 126, 127, 판다 같은 초소형 차들이었는데, 한 단계 큰 차를 사려는 소비자들을 노리고 만든 것이 팔리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아트는 싸고 쓸만한 소형차 만드는 데에는 이골이 난 브랜드여서, 앞서 만든 우노와 푼토에 썼던 설계와 부품들을 적당히 버무려 개발했고 계획한 대로 많은 나라에서 많이 만들어 많이 팔았습니다. 폭넓은 수요를 채우기 위해 3도어와 5도어 해치백은 물론 세단인 시에나(Siena)와 왜건인 팔리오 위크엔드(Palio Weekend/WE)도 나왔고, 일부 시장에는 팔리오 위크엔드를 SUV처럼 치장한 팔리오 어드벤처(Adventure)와 픽업트럭 버전인 스트라다(Strada)로도 파생되어 만들어졌습니다.
팔리오는 데뷔 후 여러 차례 부분변경되고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2016년까지 약 20년 간 생산되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푼토를 바탕으로 만든 2세대 모델이 생산되기도 했는데, 1세대 팔리오만큼 수명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워낙 오랫동안 팔린 덕분에, 지금도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등 남미 지역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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