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카 한국판 2010년 10월호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
8년 만의 페이스리프트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새 페이톤에 반영된 변화는 폭이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이미 잘 갖추고 잘 만든 차였기에, 좁은 변화의 폭이 그리 아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지난 2002년 5월. 갓 발표된 폭스바겐 페이톤을 만나기 위해 독일로 날아갔던 일은 아직도 멋진 기억으로 남아 있다. 존재감이 분명한 디자인과 호화롭게 꾸민 실내, 비 내리는 아우토반을 시속 200km가 넘는 속도로 달려도 안정감을 잃지 않는 모습에 ‘폭스바겐도 이런 차를 만드는가’하고 감탄을 내뱉었던 것, 드레스덴의 유리 공장을 둘러보며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는가’하고 입을 쩍 벌렸던 것은 페이톤과의 첫 만남이 안겨준 여러 놀라움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페이톤이 그동안 국내에서 누렸던 인기는 그때 필자가 느꼈던 그 놀라움들이 빗나간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증명해주었다. 페이톤은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 차였다. 그리고 데뷔 8년차를 맞는 올해. 페이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고 다시금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구형과 신형의 경계가 뚜렷한 새 모델로의 변신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새 단장’을 한 것이 흥미롭다. 간단히 8년 만의 페이스리프트라고 표현하는 것이 알맞겠다.
겉모습은 6세대 골프로부터 시작된 폭스바겐의 새로운 디자인 흐름을 반영한 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근본적인 틀에는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직선을 강조함으로써 강인한 이미지를 심었다. 범퍼 아래쪽에 가로로 긴 크롬 장식을 더해 날카로워진 라디에이터 그릴을 강조한 것도 차의 인상을 한층 강하게 만든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LED 램프를 적극적으로 쓴 것도 눈에 띄는데, 특히 테일램프는 램프 모양은 그대로 두면서도 안쪽 디테일을 각지게 다듬어 새로운 느낌을 준다. 도어를 비롯해 상당수 보디 패널이 그대로인데도 이전에 느껴졌던 육중함에서 조금 무게를 덜어낸 느낌이다.

실내에서도 스티어링 휠을 빼면 이미 2009년형 모델부터 바뀐 디자인이 거의 그대로 쓰이고 있다. 물론 그 디자인도 대담한 직선과 완만한 곡면을 중심으로 구성했던 데뷔 당시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존재감은 뚜렷하지만 튀지는 않는다. 내장재의 질과 색, 구성, 스위치류의 조작감 등 실내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대부분 더할 나위 없이 고급스럽지만, 고급 세단을 오랫동안 만들었던 다른 브랜드 차들에 비하면 화려함이나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품위가 여전히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대신 두툼하면서도 탄력 있는 시트 쿠션이나, 시승차가 롱 휠베이스 모델이 아닌데도 충분히 넉넉한 뒷좌석 공간, 전후좌우 온도를 따로 조절할 수 있는 4존 클리마트로닉 공기조절장치를 비롯한 풍부한 편의장비 같은 매력 포인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은 좋게 평가할 수 있다.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다. 다른 독일 브랜드 대형 세단들처럼 통합형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쓰지 않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기능이 부족하거나 조작성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전과 다름없다. 결정적으로 새 페이톤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제대로 된 한국화 작업 때문이다. 시스템의 한글화 작업이나 애프터마켓 내비게이션용 지도 소프트웨어를 결합하는 것은 다른 수입차 업체에서도 많이 하고 있는 일이지만, 페이톤은 그런 것들이 고유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위화감 없이 어우러진다. 특히 처음부터 DMB, TPEG과 같은 한국적 기능을 반영해 센터 페시아의 버튼을 만들어 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시승차는 이전 모델에서도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V6 TDI 3.0 모델이다. 엔진 소리가 실내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의식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디젤 엔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게다가 방음처리가 상당히 잘 되어 있어, 차 밖에서 듣는 엔진 소리와 안에서 듣는 소리에 차이가 크다. 기본적인 구조는 데뷔 때와 큰 차이가 없지만, 꾸준한 업그레이드 끝에 지금의 최신 버전에서는 최고출력 240마력, 최대토크 51.0kg·m이라는 수치를 얻을 수 있었다. 페이톤 데뷔 때의 225마력, 45.9kg·m과 비교하면 크게 향상된 것이다. 물론 큰 덩치만큼 무거운 차체 때문에 향상된 성능을 쉽게 체감하기는 힘들지만, 특유의 높은 토크 덕분에 달리기 자체는 부담이 없다.

경쟁 모델들이 속속 7단, 8단 자동변속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마당에 6단 팁트로닉은 왠지 시대에 뒤쳐진 것처럽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단화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닐뿐더러, 페이톤의 6단 구성은 특별히 아쉬운 구석이 없다. 의도적으로 6단 팁트로닉 변속기의 1단 기어비를 작게 잡아놓은 듯, 정지 상태에서 출발할 때에는 조금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이지만, 속도를 붙여 2단으로 넘어가면서 부터는 제법 시원스러운 가속력을 보여준다. 수치상으로는 1,500rpm부터 3,500rpm까지 최대토크가 꾸준히 이어지지만, 실제로는 2,000rpm에 살짝 못 미치는 시점부터 가속이 빠르게 붙기 시작한다.
크고 무거운 대형 세단이 비비 꼬인 연속 커브를 빠르고 매끄럽게 돌아 나갈 때의 색다른 재미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최대토크가 발휘되는 영역이 비교적 넓고 엔진 회전도 액셀러레이터 조작에 정직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굳이 변속기를 수동 모드에 놓지 않더라도 스포츠 모드를 활용하면 꽤 스포티한 느낌으로 달릴 수 있다. 물론 4단계 조절이 가능한 에어 서스펜션을 가장 스포티하게 세팅해도 어느 정도 롤링이 있기는 하지만, AWD가 빠르게 구동력 배분을 조절하고 접지력을 높이기 때문에 빠르고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다. 고속주행 때의 든든함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정체가 심한 시내구간과 과격한 주행 때문에 136km 시승구간에서의 평균 연비는 7.6km/L로 나왔지만, 소통량이 적은 도로에서는 줄곧 8km/L가 넘는 연비를 나타낸 것은 디젤 엔진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미 옛 페이톤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새 페이톤의 변화가 크게 눈길을 사로잡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 페이톤의 가치는 새로운 소비자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변화가 아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새로운 것을 더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옛 페이톤이 잘 갖추고 잘 만든 차였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폭스바겐이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는 차로서, 좁은 변화의 폭이 아쉽기 보다는 뛰어난 가치에 신선함을 더한 것이 반갑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