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생활 2000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자동차라는 것도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에, 풍경과 어울리는 차는 밖에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차 안에 앉아서도 실내공간이 액자처럼 창 밖의 가을 풍경을 보듬고 그것이 ‘그림’같은 조화를 이룬다면 이 가을에 더더욱 푹 빠지고 말 것이다. 역시 가을은 클래식한 분위기의 차가 어울리는 계절이 아닐까.
글쎄, 10년 된 차를 나이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클래시컬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디 국산차가 그런 차가 있었나. 하지만 10년 전 거품경제로 마냥 잘 나가던 풍요로운 일본은 상상도 못할 독특한 차들을 쏟아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역사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묘한 스타일을 가진 현대적인 클래식카 ‘피가로(Figaro)’다.

피가로라는 차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거품경제로 인한 일본의 넉넉한 소비풍조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차의 뼈대가 된 마치(March)라는 차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마치는 닛산의 막내 모델로 수명이 상당히 긴 편이어서, 피가로의 베이스가 된 이전 세대의 마치는 1983년에 데뷔했다. 각진 모양의 단순한 모습으로 데뷔했던 마치는 제법 튼튼하고 실용적이며 내구성도 우수한 편이어서 닛산의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팔렸지만 거품경제가 한참이던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모델의 생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즈음 닛산은 1987년 도쿄 모터쇼에 마치를 베이스로 만든 첫 스페셜 모델인 Be-1을 선보였다. 영국산 미니를 연상케 하는 스타일을 가진 Be-1은 애당초 컨셉트카로 그칠 차였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이 의외로 좋았고 완성도도 높았기 때문에 닛산은 서둘러 라인을 재정비해 1만 대 한정생산에 들어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가능성이 엿보이자 닛산은 마치를 스페셜 모델의 뼈대로 삼기로 결정했다. 개발비가 적게 드는 것은 물론 기본이 잘 되어있는 차라서 변형모델을 만들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것도 닛산에게는 매력적인 점이었다.
이어서 ‘복고’를 소재로 한 닛산의 레트로 모델들이 차례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Be-1 성공의 뒤를 이은 것은 파격적으로 화물차인 에스카르고였다. 도쿄 모터쇼에서 Be-1과 나란히 자리했던 에스카르고 역시 마치를 베이스로 한 차로, 한정판이 아닌 양산모델로 만들어졌다. 시트로엥 2CV를 연상케 하는 반원형의 단순한 디자인을 평론가들은 ‘제도판에서 튀어나온 괴상한 차’라고도 했지만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89년 도쿄 모터쇼에는 60년대 프랑스의 베스트셀러였던 르노4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미니 왜건 파오를 선보였고, 91년에는 드디어 60년대 이태리 차를 연상시키는 피가로를 내놓았다. 이 모든 스페셜 모델들이 모두 마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치는 경차와 소형차 사이에 자리한, 1ℓ 엔진을 얹은 ‘리터카’ 급의 차다. 일본의 자동차 평론가들은 경차는 법규 때문에 억지로 만든 차라서 실제로 자동차다운 차는 리터카부터라고 얘기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안정적인 달리기를 하려면 적당한 서스펜션 구성이나 휠베이스와 트레드 비율을 갖추어야 하는데 리터카 수준의 크기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을 밑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피가로라는 차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차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신기한 차다. 정통 클래식카도 아니고, 그렇다고 옛날 옛적의 ‘그 차’를 그대로 옮겨놓은 레플리카도 아니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 디자인을 사용해 현대적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그렇다고 최신 유행처럼 선을 강조한 스타일도 아니다.
지독하게 복고적인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한 것이, 베이식카 마치의 단순한 뼈대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나 할까. 복잡한 전자장비들을 사용하지 않은 마치의 뼈대가 클래식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겉은 클래식카라는 느낌이 들면서도 안에 숨겨놓은 현대적인 구성을 엿볼 수 있다.

보디는 ‘라피스 그레이(Lapis grey)’라는 이름의 파란빛이 감도는 은은한 회색이다. 피가로는 몇 가지 다른 색들을 갖고 있지만 모두 차분한 분위기를 지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뭉툭한 앞쪽에서 부드럽게 가라앉은 뒤쪽까지 가늘게 뻗어나간 크롬 라인의 은은함으로 차의 실루엣을 강조하고 있다. 헤드램프를 둘러싸고 있는 크롬장식은 광대를 연상케 하는 모양이다. 아래쪽으로는 넓게 열린 라디에이터 그릴까지 합세해 약간은 멍한 인상을 풍긴다. 보네트는 앞쪽으로 들어 여는 타입으로 요즘은 보기 힘든 모양이다. 둥근 보디를 따라 넓게 퍼진 보네트를 들어올리면 `터보`라고 쓰여진 빨간색 실린더 헤드가 눈에 띄고, 복잡한 각종 배선들이 엔진 주변을 휘감고 있다.
옆에서 보는 피가로는 단순한 모양이다. 특징 없는 곡선에 넓게 자리잡은 도어, 그리고 커 보이는 차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타이어와 휠은 둔한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웨이스트 라인 위쪽으로는 아이보리색의 톱이 얹혀 있는데, 컨버터블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하고 캔버스톱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하게 지붕과 뒷유리만 접히게 되어 있다. 수동식임에도 제법 정확히 잘 들어맞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면 원형 브레이크등과 방향지시등이 위 아래로 자리잡고 있다. 방향지시등을 바깥쪽으로 완전히 빼지 않고 적당히 안쪽으로 밀어넣은 것에서 실용적인 면보다 멋을 살리는데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범퍼 역시 차를 보호하기 위한 것보다는 차의 선과 멋을 살리기 위해 장식품같이 달아 놓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외관을 살리면서 적당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요모조모 궁리를 많이 한 흔적이 많다. 얼핏 트렁크처럼 생긴 것은 열어보면 깊이가 얕다. 알고 보니 캔버스톱을 접어넣는 공간이었다. 지붕을 씌워놓은 상태라면 트렁크 대용으로도 쓸 수 있겠지만, 넣을 수 있는 짐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진짜 트렁크는 뒤 번호판이 있는 패널을 들어야 나타난다. 캔버스톱 수납공간 아래에 있어 크기도 작고, 스페어타이어와 공구들이 자리잡고 있어 트렁크가 마치 동굴처럼 느껴진다.

실내공간은 포근한 느낌이다. 원과 타원, 반경이 큰 곡선이 적당히 버무려진 단순한 구성이고, 상아빛으로 장식된 실내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장식들 때문에 심심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지름이 큰 스티어링 휠 뒤로는 옛날 사발시계처럼 생긴 속도계와 타코미터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계기의 글꼴도 멋을 부린 고전적인 모양이다. 역사책 속에서 나올 만한 스타일의 차에 파워 윈도와 CD 플레이어는 조금 어색해 보인다. 다른 스위치들과 마찬가지로 크롬으로 통일시킨 조개껍질 모양의 스위치가 그나마 어색함을 줄여주기는 하지만.
2+2의 실내구성이지만 뒷좌석은 어린이가 앉기에도 비좁은 느낌이다. 안전벨트까지 갖춰놓았지만 여행용 가방을 고정시키는 정도가 고작일 것 같다. 시트는 낮게 꾸민 레이아웃에 맞게 앉는 위치가 낮고, 모양도 세로줄을 넣어 옛날 차처럼 꾸며놓았다. 얼핏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앉으면 포근한 느낌을 준다.
시동은 바로 걸린다. 머플러를 독특하게 설계한 탓인지 옛날 차를 연상케 하는 ‘통통통’ 소리가 이어지고, 가속을 하면 회전수가 점점 빨라지면서 ‘바라랑’ 하는 더욱 고풍스러운 소리를 낸다. 987cc 4기통 엔진에 터보를 달아 76마력의 힘을 내지만 3단 자동변속기가 물려있어 힘이 넉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터보래그가 느껴지지만 출력에서의 큰 차이는 없다. 그저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느낌만 조금 약하냐, 강하냐 뿐이다. 부드러운 달리기를 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10년 된 저배기량 차에 3단 자동변속기로 무리하게 달리는 것은 이 차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의미 없는 일이라 조용하고 부드럽게 달렸다. 편평비 70의 12인치 타이어에서 스포츠카같은 접지력을 기대할 일은 아니다. 세워 놓은 차를 밑바닥에서 올려다보면 가느다란 서스펜션 암이 앙상해 보인다. 서스펜션도 스포티하게 달리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막상 차를 타고 있으면 편안하다.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부담스러운 것은 없다. 키가 큰 마치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무게중심을 낮춘 피가로는 여성용 패션카라는 컨셉트에 맞게 급하지도, 그렇다고 둔하지도 않게 움직여 준다. 운전도 편하고, 통통 튀기는 승차감이 세련미보다는 가벼운 맛을 준다. 그래도 이 차의 기초가 된 마치는 일본에서는 레이스 입문자용으로 사랑받고 있는데 말이다.

고속에서는 적당히 무게가 실리고, 스티어링 휠도 파워지만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빠른 속도로 달릴 차가 아니기 때문에 도어 위로 뻗어나온 아이보리색 백미러가 만들어내는 바람소리를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높은 웨이스트 라인에 맞게 대시보드가 높게 자리해 있어 차 안에 파묻히는 느낌도 여유롭다. 겉보기와는 다른 고급스러운 차를 타고 있는 느낌을 준다. 무게중심이 낮고 묵직하지만 액셀 페달을 조금 세게 밟아주면 꾸준히 속도가 올라가는 것이 또다른 즐거움을 준다.
적당히 가벼운 차는 적당히 들뜬 기분을 만들어준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왔던 오드리 햅번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랄까. 그레고리 펙이 베스파 스쿠터에 공주님을 모시고 로마 시내를 유람다닐 때 같은 기분. 생긴 것도 귀엽고 움직임도 귀여운 차는 귀여운 사람이 몰아야 어울릴 것 같다. 나이보다 겉늙어 보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거저 줘도 차에게 미안해 몰고 다니기 힘들겠다. 수수한 듯하면서도 귀엽고 조금은 세련된 멋을 풍기는 전지현 같은 사람에게 한 번 타보라고 권하고 싶다.
처음 닛산이 피가로를 한정판매를 한다고 8천 대의 주문을 받았을 때 21만 명이 신청을 했다고 한다. 다음 6천 대에는 13만 명이 신청을 해 추가로 6천 대를 더 생산했다고 한다. 1년 동안 2만 대만 만들었으니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 차를 샀다는 것만으로도 피가로의 오너들은 뿌듯했을 것이다. 한정생산되어 일본에서도 찾기 힘든 차를 국내에서 접하게 되었으니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생각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도 그때의 기술이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낼 수는 없는 법. 뭔가 부족하고 어색한 느낌이 들지만, 닛산의 파이크 카들이 다들 그렇듯이 이 차는 분위기를 즐기는 차고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내 생전 이런 신기한 분위기의 차는 다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시승 당시 찍은 차 사진과 게재된 글은 카라이프넷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덧글 1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