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WD&RV 2003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매스컴에서 허머를 타고 다니는 미군을 처음 보았을 때, 저런 거구를 지프 대용으로 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땅덩어리가 넓으니 군인도 큰 차를 타는구나’ 하는 생각은 어린 마음에 복잡한 흔적을 남겼다. 나중에 민수용을 접했을 때도 충격은 마찬가지였다. 그 넓고 큰 차에 탈 수 있는 사람이 고작 4명이라니. 편의성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기능만을 생각한 군용차의 설계를 거의 그대로 민수용에 옮겨 놓은 점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탁월한 험로 주파능력이야 미군이 참전한 여러 전장에서 입증되었지만 일반인이 매일같이 험한 지형을 맞닥뜨릴 일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듯 한쪽으로 극단화된 비상식적인 요소가 역설적으로 매니아라는 군단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동생격인 허머 H2가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H2가 일반 픽업트럭 및 SUV의 섀시를 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H1의 극단적인 개성을 닮았으면서도 다루기 쉬운 차라면!’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국내에 들어온 몇 안 되는 H2 시승을 위해 차를 받는 곳으로 가는 동안에도 줄곧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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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한 중고차 매장 앞에서 만난 H2는 첫눈에 두 가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첫 번째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차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H1과 비교하면 실내 활용도가 상당히 좋아졌다는 점이다. 충격의 정도가 만만치 않은 탓에 ‘허허’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수치상으로 보아도 H2는 절대 작은 차가 아니다. H1에 비해 폭만 12cm 정도 좁을 뿐, 키와 길이는 오히려 더 크다. 게다가 볼륨감까지 더해져 3톤 가까운 차 무게를 쉽게 짐작하게 된다. 잘 단련된 군인 이미지의 H1과 비교하면 H2는 적당히 탄력 있는 민간인의 모습이다.

H2가 H1보다 실내공간을 더 넉넉하게 쓸 수 있게 된 것은 뼈대부터 완전히 다른 차이기 때문이다. H1은 생존성과 험로 주파성, 군 장비 활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설계 때문에, 사다리꼴 프레임이 차체 바닥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때문에 실내에 프레임이 차지하는 부분이 툭 튀어나와 있어 공간 활용도가 매우 낮다. 물론 군용의 경우에는 프레임 위의 공간이 무전기나 각종 화기를 놓는 데 유용하지만 민간용에서는 냉장고를 운반할 때 외에는 그다지 쓰일 일이 없어 보일 정도로 넓다 못해 허전하게 느껴졌다.

반면 시보레의 풀사이즈 SUV 타호의 섀시를 이용한 H2는 사다리꼴 프레임이 박스형 구조의 차체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실내공간을 프레임이 침범하지 않은 덕분에 앞좌석 공간이 여유롭고, 뒷좌석은 가운데 앉은 사람이 발 놓기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너른 공간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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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안은 고전적인 스타일의 가죽시트와 첨단 디자인 및 소재의 내장재가 묘하게 섞여 있다. 각과 원이 조화를 이룬 대시보드는 비교적 가벼운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져 있는데, 사이버 계열의 색상과는 달리 조금은 투박한 디자인에서 H1의 야전차 이미지가 풍긴다.

운전석에서 눈에 뜨이는 것 중 하나는 ㄱ자 형태의 변속 레버. 비행기의 드로틀 레버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이다. 또 하나 시선을 끄는 것은 통째로 움직이는 중간크기 사과만 한 통풍구. 차의 터프한 분위기를 더해 주는 재미있는 소품이다.

센터페시아 아래쪽에 나란히 자리잡은 시가 잭과 전원 잭 두 개도 다른 차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다. 위아래로 좁아 보이는 창문을 거쳐 시선을 위로 옮기면 큼지막한 선글라스 수납함 3개가 달린 오버헤드 콘솔이 있다. 뒷좌석에 통풍구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앞좌석과 별도로 온도 조절도 할 수 있다. 웬만한 고급차와 비슷한 수준의 편의장비가 갖춰진 셈이다.

트렁크는 바닥이 평평하고 상당히 넓지만, 바닥이 높아 무거운 짐을 싣고 내리기는 불편할 듯 하다. 스페어 타이어가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워낙 커서 탈부착이 걱정스럽다. 원래 3열 좌석 1개를 더 갖추고 있는 6인승이지만, 시승차는 3열을 떼어낸 상태다.

2열은 7:3 비율로 등받이를 접을 수 있다. 복잡한 레버 조작 없이 방석 부분만 앞으로 접으면 자동으로 등받이 고정장치가 풀려 트렁크 바닥과 평평하게 연결된다. 덕분에 3열 좌석에 타고 내리는 절차가 복잡하지 않다.

보네트는 가벼운 플라스틱 재질이지만 크기가 워낙 커서 한 사람이 열기에는 좀 벅차다. 앞으로 젖혀 올리는 방식과 좌우의 고정고리 등 H1의 디자인 요소와 기능을 그대로 가져왔다. 보네트 위의 방열판도 H1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H2의 것은 구멍이 나 있지 않은, 단순한 액세서리다. GM이 자랑하는 V8 6.0f리터 316마력 볼텍 엔진은 비교적 낮은 자세를 갖추고 엔진룸에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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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로드로 향하는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우르릉’ 하며 뻗어나가는 H2의 가속감은 제법 만족스럽다. 큰 배기량의 푸시로드 타입 OHV 엔진은 휘발유 엔진이면서도 디젤 엔진을 연상시키는 묵직한 저회전 토크를 자랑한다. 큰 덩치의 요상한(?) SUV에 도로 위가 웅성대는 느낌이다. 옆을 지나는 버스가 반쯤은 장난으로 시승차를 밀어붙인다. H2의 차폭이 2m가 넘으니 옆으로 피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 앞으로 피하려고 속력을 내니 액셀을 조금 밟았나 싶었는데 어느 덧 속도계 바늘은 시속 130km를 넘어서 있다.

스티어링은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이는, 전형적인 SUV의 감각이다. 속도가 붙으면 서스펜션은 작은 요철은 무시하고 얕고 긴 요철에만 출렁출렁 여유롭게 반응한다. 액셀러레이터 페달의 작동감도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라 전반적으로 운전은 편안했다. 기어비는 1단과 2단 사이의 간격이 제법 크게 느껴진다. 험로에서의 저속주행을 염두에 둔 세팅일텐데, 가파른 언덕에서 D모드에 놓으면 변속기가 허둥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폭이 30cm가 넘는 초광폭 타이어지만 머드 타입의 트레드 패턴 탓인지 포장도로의 급커브에서는 미끄러지는 소리가 생각보다 빨리 들린다.

숲 사이로 난 오프로드에 들어서니 넓은 차체가 길을 꽉 채운다. 굽이진 외길이 많은 우리나라 산에서는 넓은 트레드가 좋지만은 않은 듯 하다. 풀타임 4WD여서 험한 지형에서는 기어를 중립에 놓고 센터페시아에 있는 버튼을 눌러 로 레인지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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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레인지에서 내리막길을 구르는 속도가 빠르다는 점을 제외하면 뛰어난 험로 주파성에 놀라게 된다. 짧은 오버행으로 접근각과 이탈각이 큰 것도 한몫 단단히 하지만, 낮아 보이는 프레임도 생각보다 여유있는 지상고를 확보해 주기 때문에, 거친 지형도 걱정 없이 지날 수 있다.

블록이 좁은 패턴의 전천후 타이어는 부드러운 흙에서는 쉽게 헛돌려는 경향을 보인다. H2는 이럴 때를 위한 장치로, 2단계 조절기능의 트랙션 컨트롤을 갖추고 있다. 이 장치를 달면 험로 주행시 운전자의 통제능력에 따라 컴퓨터가 개입하는 정도와 시기를 운전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다. 두 단계 모두 민감하고 정교하게 끼어 드는 느낌은 부족하지만, 화끈한 기본기가 밑받침되어 험로 돌파에 자신감이 생긴다.

태생이 험한 곳이었던 H1과는 달리 도시를 염두에 두고 만든 H2지만, 시승을 통해 덩치에 비해서는 제법 똘똘한 오프로드 성능까지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H1보다 훨씬 뛰어난 실용성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H2의 가장 큰 매력은 앞뒤 잴 것 없는 화끈함이다. 이런 H2의 매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주변의 시선에 당당할 수 있는 자신감과, H2를 안전히 모셔 놓을 수 있는 넉넉한 주차장이 필요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