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서 엔진을 파헤친다

[ 모터 매거진 2011년 8월호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

왕복형 엔진 구조 가운데에도 수평대향 엔진, 그 중에서도 복서 엔진은 승용차에 매우 제한적으로 쓰이고 있다. 복서 엔진의 기술적 특징과 일반 수평대향 엔진과의 차이점, 실제 사용 예 등을 통해 복서 엔진을 해부해 본다

스바루 2.0L 복서 DOHC 16V 듀얼 AVCS 트윈스크롤 터보 엔진 (2003)

지난해 1월 국내에 진출한 스바루는 제품의 주요 마케팅 포인트로 대칭형 AWD 시스템과 복서 엔진을 내세우고 있다. 복서 엔진은 일반인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개념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양산차에 쓰인 사례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외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복서 엔진은 단점 이상으로 장점도 많은 엔진이다. 그래서 이번호에서는 기술적 특징과 장단점을 중심으로 복서 엔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도록 한다.

복서 엔진이 작동하는 기본 원리는 일반 엔진과 같다. 크랭크축을 회전시키기 위해 4행정이 반복되는 왕복형 엔진에 속한다. 실린더의 배치에 따라 구분하면 수평대향 엔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스바루 수평대향 6기통 엔진(2004)의 피스톤과 크랭크축 배치

수평대향 엔진은 두 개의 뱅크로 나누어진 실린더 배치가 180도인 엔진이다. 즉 V형 엔진의 뱅크각을 180도로 만든 것이다. 복서 엔진은 특히 수평대향 엔진 가운데에서도 서로 마주보고 있는 방향의 피스톤이 같은 방향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형태의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양쪽 피스톤이 크랭크축 방향으로 움직일 때의 모습이 마치 권투선수(복서)가 경기 시작 때 상대방을 향해 주먹을 맞부딪히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순수한 복서 엔진은 마주 보고 있는 피스톤이 한 피스톤 당 하나의 크랭크 핀을 사용하는 것이고, 180도 V형 엔진은 마주 보는 두 개의 피스톤이 하나의 크랭크핀을 공유하는 것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과거 페라리가 512BB, 512TR/F512M에 썼던 수평대향 12기통 엔진은 복서 엔진은 아니다.

포르쉐 911 S 2.7(왼쪽)과 911 터보 3.0에 쓰인 수평대향 엔진 (1976)

이처럼 독특한 구조가 복서 엔진의 특징을 만들어 낸다. 기본적으로는 복서 엔진은 수평대향 엔진의 장단점도 모두 갖고 있다. 먼저 장점을 살펴보면, 우선 엔진의 형태가 낮고 납작하기 때문에 차의 무게중심이 낮아진다. 낮은 무게중심은 핸들링을 민첩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준다. 포르쉐와 스바루 차들이 모터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낮게 깔리는 엔진 덕분에, 보닛의 높이를 낮춰 차의 형태를 한층 공기역학적으로 만들 수 있다. 시동이 꺼진 후에도 엔진 오일의 일부가 실린더 헤드에 남아있기 때문에 시동 직후 빠른 윤활이 가능하다는 것도 수평대향 엔진의 장점이다.

여기에 복서 엔진만의 장점이 더해진다. 엔진 회전이 부드럽고 가속반응이 빠르다는 것이다. 복서 엔진의 회전이 부드러운 이유는 뛰어난 동적 균형에 있다. 피스톤의 왕복운동으로 인해 생기는 관성 모멘트가 상쇄되기 때문이다.

수평대향 엔진은 피스톤의 수평방향 운동을 고려해 설계해야 한다 (사진: Dr. Ing. h.c. F. Porsche AG)

이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피스톤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상하방향의 진동을 일으키는 직렬 엔진에 비하면 밸런스 샤프트나 크랭크샤프트의 카운터 웨이트 없이도 엔진의 회전질감이 부드럽고 진동이 적다.

엔진의 부드러움을 좌우하는 것은 실린더의 점화순서에 따라 생기는 충격이 얼마나 잘 상쇄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복서 엔진의 부드러움은 직렬 6기통과 V12 엔진에 견줄 수 있는 동적 밸런스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크랭크샤프트에 카운터 웨이트가 없기 때문에 엔진 무게가 일반 엔진에 비해 가볍고 빠른 가속이 가능하다.

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주요 자동차 메이커들이 복서 엔진을 생산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모로 만들고 다루기 까다로운 데에 있다. 엔진의 높이가 낮은 만큼  너비가 넓어지기 때문에 서스펜션 및 엔진 주변장치의 배치가 쉽지 않다.

스바루 3.6L 복서 DOHC 엔진 (2008)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작고 민감한 문제들이 적지 않다. 피스톤은 작동 방향이 지면과 나란하기 때문에 피스톤의 아래쪽 옆면과 실린더 내벽 사이의 마찰이 큰 편이다. 이로 인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피스톤의 형상과 피스톤 링을 특수하게 제작해야 한다.

또한 생산비용도 일반 엔진에 비해 높기 때문에 폭넓게 쓰이고 있지는 않다. 4기통이라면 복서 엔진은 로커암 커버와 밸브 트레인의 부품 수가 직렬 엔진의 두 배가 된다.

최근에 들어서는 복서 엔진만의 장점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직렬 엔진도 설계와 기술의 발전으로 진동이 상당히 억제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직렬 엔진과 복서 엔진 사이의 진동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저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할 수 있도록 만든 플라이휠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제 엔진에서 이런 장점은 상쇄된다. 또한 4기통 이하의 복서 엔진에서는 상대방향으로 움직이는 피스톤의 모멘트 방향이 엇갈리기 때문에 6기통 이상의 복서 엔진만큼의 진동억제 효과는 크지 않다.

포르쉐 911 터보(997)의 수평대향 6기통 3.6L 트윈터보 엔진(2006)

현재 복서 엔진을 쓰고 있는 승용차 메이커는 포르쉐와 스바루 뿐이다. 다른 자동차 메이커에서도 일반적인 수평대향 엔진이나 복서 엔진에 대한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소수의 차종에 쓰였거나 실험 단계에 머물렀다.

두 메이커 가운데 더 적극적으로 복서 엔진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스바루 쪽이다. 항공기 제작회사에 뿌리를 둔 후지중공업은 항공기에 쓰였던 수평대향 엔진 기술을 1966년에 나온 스바루 1000부터 승용차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또한 지난 2008년에는 유럽 시장을 겨냥해 세계 최초로 승용차용 디젤 복서 엔진을 개발하기도 했다.

스바루 2.0L 복서 DOHC 디젤 터보 엔진 (2010)

포르쉐는 새로운 4기통 복서 엔진을 개발 중이다. 2.5L급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엔진은 폭스바겐 블루스포츠와 형제차로 개발되고 있는 복스터 아랫급 모델에 쓰이게 되고, 터보 버전은 복스터와 카이맨, 나아가 911에까지 쓰일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현재 포르쉐는 카이엔과 파나메라를 제외한 나머지인 복스터와 카이맨, 911에 6기통 복서 엔진을 쓰고 있고, 스바루는 경차를 제외한 임프레자, 포레스터, 레가시, 아웃백, 트리베카에 4기통 및 6기통 복서 엔진이 올라간다. 앞서 살펴본 여러 단점 때문에 여전히 복서 엔진이 자동차용 엔진의 주류에 올라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복서 엔진만의 장점은 여전하기 때문에, 전기기관이 등장해 엔진을 대체할 때까지 앞으로도 한동안 복서 엔진을 얹은 포르쉐와 스바루 차들은 계속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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