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르세데스-벤츠 매거진 2011년 9/10월호에 실린 글에서 발췌해 정리한 글입니다. ]
질버파일(Silberpfeil), 혹은 실버 애로우(Silver Arrow). 이 이름은 모터스포츠 역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유럽에서 모터스포츠가 국가간 경쟁으로 치달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1934년부터 1939년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력한 성능으로 유럽의 그랑프리 레이스 무대를 압도했던 독일 메이커 경주차들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실버 애로우였다.
실버 애로우라는 이름은 1934년에 메르세데스-벤츠가 선보인 W 24 경주차에서 비롯되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페인트를 칠하지 않은 은빛 맨살을 그대로 드러낸 W 24 경주차는 정말 화살처럼 쏜살같이 내달리며 승승장구했다. 이후 메르세데스-벤츠는 W 125, W 154 경주차로 가공할 성능을 과시하며 이태리와 프랑스 경주차들을 그랑프리 시상대에서 밀어냈다. ‘가공할’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지금의 경주차로도 좀처럼 내기 어려운 시속 300km 이상의 속도를 메르세데스-벤츠 경주차들은 이미 1930년대에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변한 안전장비나 현대적인 전자장비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었던 시절, 순전히 운전기술만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성능을 내는 경주차를 몰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던 루돌프 카라치올라(Rudolf Caracciola), 루이지 파지올리(Luigi Fagioli), 만프레드 폰 브라우히츠(Manfred von Brauchitsch)와 같은 레이서들은 전설적인 존재로 추앙받으며 메르세데스-벤츠의 이름을 높였다.
이처럼 메르세데스-벤츠가 20세기 전반 유럽 모터스포츠의 황금기를 풍미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894년에 처음으로 모터스포츠에 참가한 이후 끊임없이 기술혁신과 도전을 추구함으로써 이루어낸 결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모든 모터스포츠 활동이 중단될 때까지 실버 애로우는 독일 자동차 기술의 상징이자 독일인들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이 종전과 함께 사그라지면서 메르세데스-벤츠는 다시금 도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도전의 목표는 그랑프리 레이스의 정점인 포뮬러 원(F1)이었다. 여러 그랑프리를 하나의 선수권 대회로 묶은 현대적인 F1이 시작된 것은 1950년의 일이었다. 전후 재정비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메르세데스-벤츠는 F1을 염두에 두고 1951년부터 본격적인 모터스포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규정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1954년을 F1 진출 시점으로 정했다.

새로운 도전과제를 앞두고, 메르세데스-벤츠는 르망 24시간 레이스, 밀레 밀리아 등 장거리 스포츠카 경주에 300 SL을 출전시켜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4년 7월. 시즌 4번째 대회인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메르세데스-벤츠의 실버 애로우가 부활했다. 40년 전인 1914년에 메르세데스 팀이 1, 2, 3위를 독차지했던 바로 그 대회였다.
앞선 기술로 무장한 W 196 경주차의 운전석에 앉은 후안 마누엘 판지오(Juan Manuel Fanzio)는 첫 출전에서 팀 동료인 카를 클링(Karl Kling)과 함께 1위와 2위를 나누어 차지하며 메르세데스-벤츠의 복귀 무대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어진 5번의 그랑프리에서 메르세데스-벤츠는 3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시상대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었고, 판지오는 그 가운데 3번의 그랑프리에서 1위를 차지해 시즌 챔피언에 올랐다. 1951년에 이은 그의 두 번째 F1 챔피언 등극이었다. 이듬해인 1955년에도 메르세데스-벤츠는 W 196 경주차를 F1에 투입했다. 이번에 판지오와 팀을 이룬 것은 영국 출신의 스털링 모스(Stirling Moss)였다. 7차례의 그랑프리에서 판지오는 4승을, 모스는 1승을 거두며 각각 시즌 1위와 2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승리의 영광은 잠시뿐이었다. 1955년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사고는 새로운 실버 애로우 시대의 발목을 붙들었다. 진로 앞으로 끼어든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한 메르세데스-벤츠 300 SLR 경주차가 충돌사고 후 관중석으로 돌진하면서 82명 사망, 92명 부상이라는 모터스포츠 사상 최악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사고였지만, 메르세데스-벤츠는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위해 1955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모든 회사 차원의 모터스포츠 활동을 중단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자숙의 시간으로 보낸 메르세데스-벤츠는 1985년에 그룹 C 레이싱카에 엔진을 공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모터스포츠 세계로의 복귀를 시작했다. 메르세데스-벤츠 엔진을 얹은 그룹 C 경주차는 1989년 르망 24시간 우승을 비롯해 1989년과 1990년 그룹 C 선수권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아울러 독일 투어링카 선수권(DTM)과 국제 투어링카 선수권(ITC)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바쁜 행보를 이어 나갔다. 물론 이러한 행보의 궁극적인 목표는 F1으로의 복귀였다.

메르세데스-벤츠의 F1 복귀는 그룹 C 레이싱카 개발을 통해 좋은 파트너 관계를 맺은 자우버(Sauber)와의 협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93년 시험적으로 자우버 F1 팀을 지원했던 메르세데스-벤츠는 1995년 F1의 명문 팀인 맥라렌과 손을 잡고 F1 레이스카를 위한 엔진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F1 시즌 첫 경기에서 데이빗 쿨사드(David Coulthard)는 맥라렌 메르세데스 팀에 첫 승리를 안겨주었다. 1955년 판지오의 이태리 그랑프리 우승 이후 42년 만에 거둔 첫 승리였다.
맥라렌과 메르세데스-벤츠의 파트너십은 시간이 갈수록 빛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1998년은 기념비적인 해였다. 맥라렌 팀은 새로운 스폰서를 맞이하며 F1 레이싱카의 색상을 전통의 은색으로 바꾸었다. 실버 애로우의 부활이었다. 맥라렌 메르세데스 MP4/13 레이싱카는 주전 레이서인 미카 하키넨(Mika Hakkinen)을 1998년 F1 드라이버 챔피언으로 올려놓았고, 팀은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99년에도 하키넨은 맥라렌 메르세데스 MP4/14 레이싱카로 다시금 F1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했다.

이후로 한동안 맥라렌 메르세데스 팀은 드라이버와 팀 순위 상위권을 맴돌면서도 좀처럼 시즌 챔피언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F1 첫 흑인 레이서인 루이스 해밀턴(Lewis Hamilton)이 2007년 시즌 2위, 그리고 2008년 드라이버 챔피언에 오르면서 강자의 저력을 과시했다.
2010년에 이르러 메르세데스-벤츠는 많은 F1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2009년 F1 시즌 컨스트럭터 챔피언이었던 영국의 브런(Brawn) GP를 인수함으로써 엔진 공급자를 넘어 직접 레이스카를 제작해 출전하는 워크스(Works) 팀을 갖춘 것이다. 1955년 시즌을 끝으로 F1 워크스 팀을 해체한 후 45년 만의 일이었다. 새로운 팀은 말레이시아 정유업체인 페트로나스(Petronas)와 장기 스폰서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메르세데스 GP 페트로나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워크스 팀은 한 회사가 팀의 활동에 필요한 인력과 자금을 모두 지원하는 팀을 말한다. 현대적인 F1에서는 워크스 팀이 많지 않은데, 이는 레이싱카를 만들기 위해 고도의 전문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핵심요소인 섀시와 엔진에 대한 전문기술을 한 팀에서 모두 갖추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F1 레이싱카는 대개 팀에서 레이싱카의 뼈대에 해당하는 섀시를 개발하고, 엔진은 별도의 공급자로부터 구입해 얹는다. 그러나 메르세데스 GP 페트로나스는 섀시와 엔진의 개발과 제작이 모두 팀 내에서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워크스 팀이다. 현재 F1에 참가하고 있는 12개 팀 가운데 워크스 팀은 메르세데스 GP 페트로나스를 포함해 3개 뿐이다.
새로운 메르세데스-벤츠의 워크스 팀이 팬들에게 준 또 하나의 충격은 F1 역사상 최고의 드라이버로 손꼽히는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의 복귀였다. 2006년 시즌을 끝으로 F1에서 은퇴한 그는 역대 7회 챔피언, 역대 최장기간 연속 챔피언, 역대 최다횟수 우승, 역대 최다 연승, 시즌 최다승, 시즌 최다 입상 등 수많은 기록을 갖고 있는 F1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주전 드라이버 자리는 신예인 니코 로즈버그(Nico Rosberg)에게 주었지만, F1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던 드라이버의 복귀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4년 동안 F1에서 떠나 있던 슈마허를 돌아오게 한 장본인은 바로 메르세데스 GP 팀의 감독인 로스 브런(Ross Brawn)이었다. 그는 슈마허가 F1 드라이버 챔피언이 된 1994년과 1995년, 그리고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시즌 동안 슈마허가 소속되었던 팀의 감독으로서 그를 챔피언의 길로 인도했다. 슈마허 역시 복귀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브런과 함께 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브런의 설득이 아니었다면 F1 레이싱카로 경주에 출전하는 슈마허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메르세데스-벤츠에게도 슈마허의 F1 복귀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가 메이저급 모터스포츠로 진출하게 된 계기는 1990년과 1991년에 메르세데스-벤츠 주니어 팀으로 그룹 C와 DTM에 출전한 것이었고, 1991년에 조던 팀 드라이버로 F1에 데뷔한 것도 메르세데스-벤츠의 지원 덕분이었다. F1 최고의 영웅이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을 제공한 것이 바로 메르세데스-벤츠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