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터매거진 2013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실버 고스트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롤스로이스 40/50 HP는 당대 다른 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정숙성과 내구성을 지닌 차였다. 완벽한 기술을 추구한 헨리 로이스의 노력이 만들어낸 이 차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롤스로이스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한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업가 찰스 롤스(Charles S. Rolls)는 1890년대에 영국에서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던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영국 자동차 클럽 창립 멤버 중 하나였는데, 1904년에 같은 클럽에서 독자적으로 자동차를 만든 헨리 로이스(Sir Henry Royce)를 만나면서 자동차 역사에 새로운 장을 쓰게 되었다. 로이스의 자동차 개발에 롤스가 재정 지원을 하고, 만들어진 차를 롤스-로이스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기로 한 것이었다.
로이스는 기술적 완벽을 추구한 엔지니어였고, 완벽한 기술을 담은 차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다. 만약 롤스가 로이스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거나 그에게 세상 누구보다도 뛰어난 차를 만들겠다는 집념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롤스로이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탁월한 부드러움과 조용함 지닌 차
19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자동차는 대부분 거칠고 시끄러우면서 고장이 잦았다. 로이스가 초기에 만든 차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세련된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차가 직렬 6기통 엔진을 얹은 40/50 HP였다.
1906년 11월에 열린 올림피아 모터쇼에 처음 공개된 40/50 HP는 당시 차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작동하는 엔진과 주행감각을 지닌 차였다. 이 차에 쓰인 직렬 6기통 엔진은 원래 만들었던 6기통 엔진이 너무 거친 것이 불만이었던 로이스가 더 신뢰할 수 있으면서 부드럽고 조용한 엔진을 만들려고 했던 시도의 결과물이었다.
이 엔진은 낡은 기술과 최신 기술이 어우러진 특이한 것이었다. 3기통 실린더 블록 두 개를 이어붙이고 그 위에 고정식 실린더 헤드를 단 구조와 노출된 사이드 밸브 계통과 같은 부분은 당대에도 그리 앞선 기술은 아니었다. 그러나 7개의 메인 베어링을 갖춘 윤활식 크랭크샤프트처럼 당시 수준으로 앞선 기술은 튼튼한 크랭크케이스와 함께 엔진 진동을 크게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 그 덕분에 40/50 HP는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조용하고 부드럽게 달릴 수 있었다.

40/50 HP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1907년에 영국 왕립 자동차 클럽(RAC) 주관으로 열린 2만 4,000km 내구 레이스였다. 이 경주에 출전한 은색 차체와 은색 내장재를 갖춘 독특한 40/50 HP 오픈 투어러는 레이스 전 구간을 거의 멈추지 않으면서 완주했고, 달리는 내내 다른 차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주를 지켜본 본 사람들은 이 차에게 은빛 유령, 즉 실버 고스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때부터 40/50 HP는 실버 고스트로 불리게 되었고 롤스로이스의 명성도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아가 4년 뒤에 열린 런던-에든버러-런던 경주에서는 약 8km/L의 연비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처럼 크고 무거운 차에서 얻을 수 있는 연비로는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으니 당시에는 더욱 놀라운 연비였던 셈이다.

튼튼함과 조용함의 대가는 높은 가격
실버 고스트가 첫 고객에게 인도된 것은 1907년 4월의 일이다. 그 후로 꾸준한 개량을 거치며 1925년까지 실버 고스트의 생산은 이어졌다. 처음에는 맨체스터 시에 있는 로이스의 쿡 스트리트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성공을 거두자 롤스로이스는 생산거점을 더비 시의 나이팅게일 로드에 만든 전용 공장으로 옮겼다.
초기 대다수 유럽 고급차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롤스로이스 역시 대부분 섀시와 구동계 제작을 주로 하고 차체는 코치빌더가 소비자 요구에 맞춰 따로 만들었다. 섀시 무게만도 1톤 가까이 나갔기 때문에, 차체까지 얹은 완성차의 무게는 훨씬 더 무거웠다. 대부분의 실버 고스트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실버 고스트의 값은 차체를 제외한 섀시와 구동계만 해도 보통 전문직 종사자 연봉의 5~10배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대중과는 거리가 먼 차였던 셈이다.
원래 이 차에는 직렬 6기통 7,036cc 엔진이 쓰였지만, 1909년에 배기량이 7,428cc로 커졌다. 이후로도 꾸준히 개선이 이루어져 최고출력은 초기의 49마력에서 후기에는 77마력까지 차츰 높아졌다. 첫 모델의 최고시속은 약 97km 정도였지만 나중에 배기량이 커지면서 출력이 높아진 모델은 최고시속이 약 130km까지 올라갔다. 차의 무게를 생각하면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성능은 아니었지만, 부족한 수준도 아니었다.
엔진 이외의 다른 부분도 기본적인 구성은 매우 보수적이었고, 로이스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배전기와 카뷰레터 등은 다분히 시대 흐름에 뒤처진 느낌을 주기도 했다. 끊임없이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그조차 혁신적인 것은 드물었다. 오랫동안 브레이크는 뒷바퀴에만 달려 있었고, 앞바퀴에 브레이크가 더해진 것은 생산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24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첨단 기술을 쓰지 않은 것은 실버 고스트의 또 다른 강점인 내구성과 신뢰성에 영향을 미쳤다. 로이스의 기본 철학에 따라 모든 부품은 당대에 쓰이는 것 가운데 가장 튼튼한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 덕분에 실버 고스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전선에서 쓰일 장갑차의 기본 모델로 선택될 수 있었다. 특히 중동과 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어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T. E. 로렌스는 실버 고스트에 매료되어 “여력이 된다면 내 롤스로이스와 평생 쓸 수 있는 타이어와 휘발유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차면서 롤스로이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기도 한 실버 고스트는 20년 동안 7,876대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