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매거진 2014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닛산 블루버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오스틴과 제휴를 통해 쌓은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형차다. 뛰어난 신뢰성을 바탕으로 데뷔와 함께 큰 인기를 끌어, 일본 자동차 대중화를 이끄는 한편 닛산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조립생산되어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는 뜻깊은 모델이다.

일본 자동차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과 전쟁 후 연합국의 통제로 자동차 생산이 제한되며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1949년에 승용차 생산 제한이 풀렸지만 오랫동안 개발과 생산이 중단된 탓에 일본차 회사의 기술력과 제품 경쟁력은 같은 시기 미국과 유럽 회사들에 크게 뒤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정책적으로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시작했고, 외국 자동차 회사와 기술제휴 및 생산을 허용해 시장에 일본차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런 정책의 도움을 받은 회사 가운데에는 닛산이 있었다.

닛산은 1952년에 영국 오스틴과 제휴를 맺고 조립 생산을 시작했고, 차츰 부품 국산화를 통해 기술력을 쌓아 1955년에는 전후 첫 독자 모델인 닷산 승용차(110형)를 내놓았다. 앞서 개발한 트럭 설계를 바탕으로 만든 닷산 승용차는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구조로 인기를 끌었고, 이를 대폭 개선해 1957년에 내놓은 닷산 1000(210형)으로 발전하며 꾸준히 판매를 늘려 나갔다. 두 모델로 소형 승용차 시장에서 입지를 굳힌 닛산은 그동안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접목해, 1959년에 새로운 소형차인 블루버드를 내놓기에 이른다.

닛산 차 처음으로 독립된 모델 이름 써

블루버드는 닛산 차 중 처음으로 독립된 모델 이름을 썼다. 모델 이름은 벨기에 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에서 유래한 것으로, 희곡의 내용처럼 ‘행복은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디자인은 110형과 210형에 이어 닛산 소속 디자이너인 사토 쇼조(佐藤章蔵)가 맡았다. 당시 보편적인 미국차를 축소한 듯한 겉모습은 앞서 나온 110형과 210형에 비하면 균형있는 비례를 갖추었고, 독특한 테일램프 디자인 때문에 감의 씨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차체는 4도어 세단 한 가지였다.

엔진은 닛산이 면허생산한 오스틴 A50 캠브리지에 쓰인 B 시리즈를 바탕으로 배기량을 줄인 것을 썼다. 닷산 1000으로부터 이어진 직렬 4기통 34마력 1,0리터를 기본으로 새로 개발한 43마력 1.2리터 휘발유 엔진이 추가되었다. 3단 수동변속기를 단 1.2리터 모델은 최고 시속 111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1.2리터 엔진을 얹은 것은 수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당시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인기를 얻은 폭스바겐 비틀을 의식해 그에 필적하는 성능을 얻기 위한 구성이었다. 또한 앞바퀴에 일본차 중 처음으로 유니서보(uni-servo) 형식 드럼 브레이크를 사용했다.

구조는 110형과 210형처럼 사다리꼴 프레임 위에 차체를 얹는 형태였지만, 이전에 만든 승용차들과 달리 앞 서스펜션을 좌우 독립식으로 설계하고 코일 스프링과 스태빌라이저 바를 써서 승차감과 운전 특성이 상대적으로 뛰어났다. 뒤 서스펜션은 판 스프링을 쓴 리지드 액슬 구조로 이전 모델의 설계에서 한층 발전된 형태였다. 포장률이 높지 않았던 당시 도로 여건을 감안하면 리지드 액슬 구조를 쓰는 것이 바람직했다. 또한 차체를 경량화해 이전 모델인 닷산 1000보다 크면서도 무게는 30kg 더 가벼웠다.

블루버드는 데뷔와 함께 1달 동안 8,000대의 선주문이 밀릴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당시 일본 승용차 시장은 연간 판매가 12만 대(1960년) 남짓할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큰 인기 덕분에 닛산은 역사상 처음으로 승용차 생산이 월 3,000대를 넘기며 본격적인 대량 생산 단계에 접어들 수 있었다. 

큰 인기 얻으며 일본 자동차 대중화 이끌어

블루버드의 가장 큰 인기 비결은 신뢰성이었다. 구조가 비교적 간단해 내구성이 뛰어났을뿐 아니라 앞서 나온 차들처럼 닷산 트럭과 공유하는 부품이 많아 정비성이 뛰어났다. 주 수요처인 택시회사에서 선호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출시 직후 뒷좌석 너비를 40mm 키우면서 뒷좌석 탑승인원이 2명에서 3명으로 늘어났는데, 더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있게 되어 택시회사에서 특히 반겼다. 택시 시장에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점차 수요가 늘고 있던 일반 승용차 시장에서도 입지를 넓힐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블루버드는 1960년대 초반 일본 소형차 시장에서 닛산을 강자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60년에 이루어진 마이너 체인지에서는 1.0리터 엔진의 출력이 43마력으로, 1.2리터 엔진의 출력이 55마력으로 높아졌다. 출력 향상에 힘입어 1.2리터 엔진 모델의 최고속도는 시속 120km로 높아졌다. 마이너 체인지와 함께 일본차 최초로 모든 단에 싱크로메시가 쓰인 풀 싱크로메시 변속기가 쓰여 운전이 더 편해졌다. 풀 싱크로메시 변속기는 변속 때 더블 클러치를 사용하는 등 까다로운 조작을 할 필요가 없어, 택시 운전자는 물론 일반 운전자에게도 호평을 얻었다. 1962년에는 기계식 반자동 변속기인 삭소매트 오토클러치가 선택사항으로 추가되었다.

한편 블루버드는 일본차의 모델 다양화를 선도한 모델로도 평가받는다. 1960년에는 가지치기 모델인 에스테이트 왜건이 추가되었는데, 이 모델은 일본 자동차 회사가 내놓은 첫 스테이션 왜건이었다. 또한 1961년에는 일본차 중 처음으로 여성운전자를 고려한 특별 모델인 팬시 디럭스(Fancy Deluxe)가 추가되었다. 이 모델은 분홍색 계열의 실내외 색상이 특징이었고, 방향 지시등을 켜면 오르골 소리가 나고, 우산꽂이와 하이힐 수납공간을 마련하고 선 바이저에 화장용 거울을 다는 등 여성의 취향과 생활을 반영한 36가지 장비를 단 것이 특징이었다. 

1세대 블루버드는 1963년에 2세대 블루버드(410형)에게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4년여 동안 약 21만 대가 생산되며 1960년대 초반 일본을 대표하는 소형차가 되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블루버드가 경쟁차인 도요타 코로나와 소형차 시장 선두를 놓고 벌인 치열한 경쟁이 BC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블루버드와 코로나의 경쟁은 일본 소형차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한편 일본의 자동차 대중화를 이끌었다. 또한 닛산과 도요타는 두 차 덕분에 일본 자동차 산업을 이끄는 회사로 자리매김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 차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다. 1962년부터 1963년까지 새나라 자동차를 통해 2,700여 대가 조립생산되어 처음으로 국내에서 생산된 현대적인 승용차라는 기록을 얻은 것이다. 블루버드는 국내에서 조립생산되기에 앞서 완제품으로도 소량 수입되어 택시로 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