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 마티즈 디자인이 피아트가 버린 걸 집어온 거라고? 글쎄…

[ 2023년 4월 18일에 페이스북 개인 계정에 올린 글을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 ]

많은 분이 대우 마티즈 디자인이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피아트 친퀘첸토 후속 모델 제안했던 걸 피아트가 퇴짜 놓자 대우가 집어 온 것’으로 알고 계신데, 실상은 그와는 좀 다릅니다.

피아트 친퀘첸토

1991년 12월에 피아트가 누오바(Nuova, 신형) 500의 발전형으로 오랫동안 생산된 126의 후속 모델인 친퀘첸토를 내놓습니다. 500을 이탈리아어로 읽으면 친퀘첸토(Cinquecento)가 되는데, 이번엔 모델 이름을 숫자가 아니라 글자로 썼죠. 이름은 둘째치고, 친퀘첸토는 이전 모델인 126은 물론 그 이전 모델인 누오바 500도 그랬듯, 피아트 모델 라인업의 막내 모델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고 저렴한 도시형 차 자리를 차지합니다.

피아트 126

친퀘첸토가 나오고, 이탈리아자동차공업협회(ANFIA)는 1992년 4월에 열린 토리노 모터쇼를 준비하면서 이탈리아 카로체리아들에게 1990년대 도시형 소형차라는 통일된 주제로 친퀘첸토를 바탕으로 한 쇼카를 만들어볼 것을 주문합니다. ANFIA는 자동차 제조사 중심의 조직인 우리나라의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와 달리, 제조사는 물론 부품사, 연구 개발 업체 등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 관련 업체와 기관을 총괄하는 조직입니다. 여기에는 흔히 카로체리아로 알려진 독립 디자인 및 엔지니어링 업체들도 포함되어 있죠.

물론 이탈리아 최대 자동차 업체인 피아트가 그 중심에 있는 만큼, 피아트에게 의미 있는 새 모델의 출시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일종의 후광 효과를 낼 수 있는 이벤트기도 했죠. 친퀘첸토의 의미가 컸던 것은 1957년에 처음 나온 누오바 500과 그 후속 모델로 1971년에 나온 126까지 차체 뒤쪽에 엔진을 얹은 RR(뒤 엔진 뒷바퀴 굴림) 동력계 배치를 갖췄던 것에서 벗어나 FF(앞 엔진 앞바퀴 굴림) 구조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여러 카로체리아가 참여해 각자 개성 있는 차들을 만들어 내놓습니다. 아래 사진에 나온 게 그 차들입니다.

1992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된 이탈리아 카로체리아들의 피아트 친퀘첸토를 바탕으로 한 콘셉트 카들

몇몇은 친퀘첸토의 모습이 남아있지만, 몇몇은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 있는 코지올라 피온다(Coggiola Fionda, 빨간색), 오른쪽 위에 있는 I.DE.A 그리구아(I.DE.A Grigua, 녹색-노란색), 오른쪽 가운데에 있는 이탈디자인 ID 친퀘첸토(ItalDesign ID Cinquecento, 흰색), 오른쪽 아래에 있는 베르토네 친퀘첸토 러시(Bertone Cinquecento Rush, 노란색)처럼 말이죠.

이탈디자인 ID 친퀘첸토 콘셉트

이때 이탈디자인이 만든 ID 친퀘첸토는 형태만 있고 움직일 수 없는 일종의 목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탈디자인이 1970년대부터 도시형 차에 즐겨 썼던 모노볼륨 스타일에 80년대 후반부터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한 곡면을 반영해 개성 있는 분위기를 냈습니다. 3도어 해치백 스타일을 빼면 친퀘첸토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느낄 수 없는 독창적 디자인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지붕의 (무늬만) 캔버스 톱과 차체 옆면의 캐릭터 라인 등 오리지널 500에 쓰였던 요소들을 응용해 일종의 오마주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디자인 루치올라 콘셉트

이 ID 친퀘첸토를 이탈디자인이 독자 프로젝트로 헤드램프를 원형으로 바꾸는 등 외형 디자인을 발전시키고 실내를 꾸미고 동력계를 넣어 주행 가능하게 만든 차가 1993년 볼로냐 모터쇼에서 공개한 루치올라(Lucciola)입니다. 차체 형태와 주요 요소는 앞서 나온 ID 친퀘첸토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사각형에 가까웠던 헤드램프는 원형으로 바뀌고, 범퍼 형태도 달라졌습니다. 휠도 애프터마켓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바뀌었고요.

대우 마티즈

그리고 대우는 루치올라의 디자인을 사와서 마티즈로 구현했습니다. ID 친퀘첸토와 루치올라, 마티즈에 관한 이야기는 이탈디자인 웹사이트에도 짤막하게 나와 있습니다. 시장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3도어였던 차체는 5도어가 되었고, 생산 비용과 공정, 부품 단가와 법규 충족 등 여러 이유로 원형인 루치올라에서도 적잖이 바뀌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잘 살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아트 세이첸토

피아트가 이탈리아 카로체리아들과 협력해서 양산차를 디자인한 사례도 많지만, 오래전부터 자체 디자인 역량을 갖추고 있었던 만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곳에 맡기지 않아도 됐습니다. 1980년대 주요 라인업 디자인을 카로체리아들의 제안을 받아 했던 건 좀 특이한 상황이었죠. 1991년의 친퀘첸토 역시 피아트 자체 디자인이었고요. 친퀘첸토의 진짜 후속 모델로 1998년에 나온 세이첸토(Seicento, 600)는 친퀘첸토의 주요 디자인 요소를 둥글게 다듬는 정도로 피아트 내부에서 디자인했습니다.

그래서 ID 친퀘첸토를 비롯한 카로체리아들의 친퀘첸토 기반 쇼카들은 친퀘첸토 후속 모델과는 별개의 프로젝트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즉 친퀘첸토가 계기가 되기는 했어도, 대우 마티즈의 디자인이 피아트가 버린 것을 재활용했다는 표현은 지나친 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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