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터트렌드 한국판 2010년 9월호 그랜드 투어링 특집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

내일 모레면 40대로 접어드는 나이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웬만한 장거리 주행은 피곤해서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사실 국토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도 500km가 넘지 않는 작은 나라에서 멀리 달려봐야 거기서 거기이지만, 문제는 몹쓸 체력이다. 일단 편도 200km가 넘는 거리는 편한 차를 몰지 않는 한 출발하기가 싫다. 이럴 때 떠오르는 차가 그랜드 투어링 카(Grand Touring Car), 혹은 그랜드 투어러(Grand Tourer)다. 

이런 개념의 차를 이해하려면 어원이 된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알아야 한다. 그랜드 투어는 철도 발달 이전인 17~18세기에 유럽 귀족과 상류층 사이에 유행했던 여행이다. 북유럽과 영국의 청년 귀족들이 문화와 예술, 정치 등 여러 분야의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유럽 본토인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의 명소와 중심지를 두루 둘러보고 오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부잣집 도련님의 수학여행.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한 번쯤 갔다 와야 상류층 사이에서 유유상종할 수 있었다.

상류층 자제분들이 움직이시는 여행이 단출할 리 없다. 가정교사에, 하인, 통역까지 대동하려면 적잖은 무리가 함께 이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고귀하신 분들이 먼 거리를 움직이는 데 힘들고 고생스러우면 안 되니, 편하고 넉넉하고 화려한 전용 마차들이 등장한다. 유럽 자동차 문화의 뿌리가 마차 문화에 있으니, 그런 마차를 대신하는 성격의 차들을 그랜드 투어러(너무 기니까 그냥 GT라고 하자)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배경을 알면 현대적인 GT의 필수요소들은 단순명료해진다. 편안하게 장거리 고속주행을 할 수 있는 차여야 한다. 그리고 멋진 스타일도 빼놓을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부잣집 도련님에 어울리는 ‘뽀대’가 나야 한다. 여기에 가족용이나 어른용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으려면 2도어 쿠페가 제격이다. 마지막으로, 대중적인 브랜드는 절대 GT다운 GT를 만들 수 없다. 왜? 명품이나 되어야 나오는 ‘뽀대’가 없으니까.

함께 나온 포르쉐 파나메라 4가 예측을 깨고 대단히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GT로서 만족스럽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4도어 4인승 GT라는 새로운 유행의 트렌드리더라는 점은 대단한 메리트이고, 포르쉐라는 브랜드 프리미엄도 만만치 않다. 결정적인 문제는 다름 아닌 스타일이다. 어느 모로 보나 포르쉐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펑퍼짐한 꼬락서니가 차 자체가 주는 감동을 절반쯤 깎아먹는다. 아무도 이 차를 ‘부잣집 도련님의 수학여행용 차’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즈니스 클래스가 아무리 좋아도 비즈니스 제트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 나온 메르세데스-벤츠 E350 쿠페 역시 그런 점에서 조금 애매한 면이 있다. 적어도 메르세데스-벤츠라면 GT에 어울리는 브랜드이기도 하고, 그간 내놓은 차들 가운데 멋진 GT들도 꽤 있다. 지금의 라인업에서는 응당 CL클래스가 제대로 된 GT다. 이런 점만 놓고 보더라도 CL클래스의 아랫급인 E클래스 쿠페의 입지는 애매하다.

하지만 GT 기준으로 작은 덩치라는 약점을 상쇄시키는 강점들도 분명히 있다. 우선 디자인이 그렇다. 겉모습이 닮은 E클래스 세단보다 균형감이 훨씬 뛰어나다. 세단에서 조금 어색했던 뒤 펜더 부분은 오히려 쿠페만을 위한 디자인처럼 자연스럽다. 안정적이면서도 존재감이 분명하다. 그리고 AMG 패키지 모델인 시승차는 겉모습에도 액센트가 더해져 좀 더 스포티한 분위기다. 사소한 차이가 겉보기 나이를 10살 쯤 어려 보이게 만든다(그래봐야 40대이긴 하지만).

실내 구성은 세단과 비슷하지만 사소한 차이가 고급스러움을 키운다. 세단의 구닥다리 내비게이션은 차라리 없는 것이 다행이다. 동반석의 인간 내비게이션을 잘 활용할 일이다. 실내 공간도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여유롭고 편안하다. 몸을 잘 잡아주면서도 편안한 AMG 패키지의 세미 버킷 시트는 패키지에 포함된 멀티 컨투어 시트 조절장치를 건드리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하다.

백레스트 옆 레버를 당기면 자동으로 슬라이딩 되는 앞좌석을 젖히면 예상 외로 넉넉한 뒷좌석으로 드나들 수 있다. 겉보기와는 달리 뒷좌석도 머리 공간의 여유만 적을 뿐이다. 짐 공간도 2명이 며칠 쓸 짐을 싣기에 충분하다. CL 클래스에서 살짝 거품을 뺀 느낌이 E 클래스 쿠페 그 자체다.

이제 초점은 달리기 영역으로 넘어간다. 272마력 V6 3.5L 엔진과 7G트로닉 7단 자동변속기의 조합은 한동안 벤츠를 대표하는 파워트레인 조합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빛이 바랜 느낌이다. 이 정도 크기 차체와 무게에 딱 알맞은, 살짝 힘에 여유가 있어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힘을 낸다. 가속은 매끄럽고, 크루징도 넉넉함이 적을 뿐 편안하다. 정통 스포츠카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오히려 GT다운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스티어링과 핸들링은 늘 끈적함을 잃지 않고, 고속에서도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듬직하다. 여러 차를 두루 몰다가 빗길에서 E 350 쿠페의 스티어링 휠을 다시 잡았다. 내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다. 자칫 스티어링이 제멋대로 놀지 않을까봐, 코너에서 차체 뒤쪽이 미끄러질까봐, 브레이크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할까봐 온 감각을 칼끝처럼 집중시킬 필요가 없다. 빗길을 달리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차는 많지 않다. 그래도 ‘차체가 조금만 더 컸으면, 힘이 조금 더 넉넉하다면’하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꽤 괜찮은데 뭔가 아쉽다. 이게 E350 쿠페의 한계다.

처음부터 E350 쿠페가 GT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GT로서의 자질을 확인하고 싶었고,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정통 GT의 풍요로움은 모든 면에서 살짝 부족하다. 딱히 모자라지는 않지만 대단히 풍요로운 느낌은 아니다. 말하자면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자제 축에 넣기는 뭐하고, 동네에서 알아주는 지역 유지 자제를 위한 맛배기 GT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이런 성격의 차를 ‘주니어 GT’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만약 ‘주니어 GT’라는 장르가 널리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 장르를 대표하는 차로 충분히 E350 쿠페를 추천할 수 있다.

[ 2010 마세라티 그란 투리스모 S 오토매틱 ] 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