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터 트렌드 한국판 2012년 4월호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 내용은 필자가 부자라고 가정하고, 모터 트렌드 편집부가 마련한 13대의 차 가운데 자신의 취향을 대변하고 소유하고 싶은 차 세 대를 골라 그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가정에 바탕을 둔 소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하신 아버지와 평범한 주부로 일평생 살아오신 어머니.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 아무 밑천 없이 시작된 나의 사회생활은 ‘맨 땅에 헤딩’의 연속이었다. 그 수많았던 헤딩들이 내 밑천이 되었고, 20년 넘게 쌓은 밑천과 소심하고 깐깐한 성격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자수성가라는 것이 내가 살아온 과정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한 말인 듯하다.
살림살이는 넉넉해졌지만, 그렇다고 재벌가 사람들이 부럽지 않을 만큼 다방면으로 재산이 쌓여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뿐이고, 아직까지 직접 발로 뛰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꿈꾸어 왔던 이상적인 회사를 만들고 나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지금의 넉넉함을 과시하기보다는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 나를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도록 적당히 눈치를 보며 씀씀이를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와중에도 나와 가족의 생활을 위해 필요충분한 차들을 몇 대 구입한 건 순전히 내가 차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1. 메르세데스-벤츠 E 63 AMG
평상시에 내가 발로 쓰는 차는 메르세데스-벤츠 E 63 AMG다. 어차피 회사 명의로 리스해 타고 다니기는 하지만 굳이 뒷좌석 중심의 대형 세단을 타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회사의 대표이사라도 기사를 두고 뒷좌석 신세를 질 만큼 회사 규모가 크지도 않거니와, 거래처들 역시 고만고만한 곳들이기 때문에 직접 차를 몰고 움직이는 쪽이 서로에게 덜 부담스럽다. 경쟁업체나 업계 관계자들이 보내는 삐딱한 시선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큰 차를 몰 만한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직접 몰고 다닐 차라면 가능한 한 내 입맛에 맞는 차를 고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E 63 AMG는 직접 몰고 다니기에 가장 알맞은 크기와 성격의 차다. E 클래스는 C 클래스가 주는 세컨드카 같은 이미지도, 운전석에 앉은 사람의 지위를 모호하게 만드는 S 클래스의 위압감도 없다. 차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눈썰미가 웬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 차를 평범한 E 200 CGI나 E 300과 뚜렷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대충 훑어본다면 이 차는 서울 강남 거리에 흔하게 널린 E 클래스를 그저 조금 화려하게 꾸민 것에 지나지 않는다. 메르세데스-벤츠 브랜드가 갖고 있는 성공한 사업가의 차라는 이미지를 주면서도, 결코 내가 가진 부나 능력을 과시한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그래도 E 63 AMG는 다른 E 클래스와는 다른 세계의 차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V8 엔진이다. 여러 종류의 엔진들이 있지만, V8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은 엔진은 없다. 다운사이징이라는 대세를 따르면서 배기량은 작아지고 터보차저가 올라갔지만, 여전히 AMG 튜닝의 메르세데스-벤츠 V8 엔진은 매력적인 소리를 낸다. 음색의 박력은 투박하고 거친 미국제 푸시로드 타입 V8 엔진이 부럽지 않으면서도, 독일 엔진 특유의 세련미와 정갈함을 지니고 있다. 액셀러레이터를 깊이 밟을 때 뒤통수 저편에서 들려오는 ‘바라랑’하는 우렁찬 리듬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풍부한 힘은 운전의 적인 가속의 스트레스를 잊게 만든다. 치밀한 힘의 변화를 더 섬세하게 느끼며 운전을 즐기기에는 디젤 엔진보다 대 배기량, 그것도 터보차저가 힘을 보태는 휘발유 엔진이 좋다.

그렇다고 다루기 까다로울 만큼 과격하지 않지도 않다. 얌전히만 몬다면 이 차가 갖고 있는 힘과 능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스포츠 서스펜션 때문에 일반 E 클래스보다는 승차감이 탄탄하지만, 도심 주행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부담스럽지는 않다. 천천히 달릴 때나 빠르게 달릴 때나 편안함을 잃지 않는 메르세데스-벤츠의 미덕은 AMG 모델이라고 다르지 않다. 충분한 힘과 적당히 넉넉함을 안고 있는 서스펜션이 조화를 이루어 E 63 AMG를 다루기 좋고 모는 재미가 출중한 차로 만든다. 이모저모 다 따져봤을 때 내가 일상적으로 쓰기에 가장 알맞은 성격을 지닌 차다.
#2. 폭스바겐 투아렉 V8 4.2 TDI R-라인
밤마다 집의 차고에 E 63 AMG와 나란히 서 있는 폭스바겐 투아렉 V8 4.2 TDI R-라인은 와이프를 위해 가족용 차로 고른 것이다. 솔직히 원래 가족용 차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포르쉐 카이엔 터보와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수퍼차지드. 이들을 제쳐놓고 굳이 폭스바겐 투아렉을 고른 것은 역시 카이엔이나 레인지로버가 주는 위압감과 존재감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라디에이터 그릴 한 가운데에 폭스바겐 엠블럼이 붙어 있다면 사람들이 차를 보는 시선은 조금이나마 너그러워진다.

브랜드 프리미엄이 약할 뿐, 투아렉은 포르쉐 카이엔이나 아우디 Q7 같은 형제 차에 비해 꿀릴 구석이 거의 없다. 밋밋했던 구형과 달리 요즘 팔리고 있는 신형은 겉모습도 제법 근육질 느낌이 난다. 실내도 알차게 꾸며져 있다. 앞뒤 좌석 공간도 넉넉하고 꾸밈새도 고급스럽다. 간혹 부모님을 모시고 움직일 때에도 불편해하거나 안쓰러워하시지 않는다. 실내가 조용하고, 승차감이 차분해서 장거리를 달려도 어른과 아이 모두 피로를 호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휴일이 일정치 않은 내가 언제든 가족과 함께 캠핑이나 여행에 나서려고 할 때 가장 부담 없이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투아렉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아이를 포함한 세 식구가 쓰는 캠핑장비 풀 세트는 부피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투아렉이라면 굳이 캠핑에서 돌아와 집안에 장비들을 부려놓을 필요 없이 항상 차 안에 실어놓을 수 있다. 와이프가 쇼핑갈 때 주로 쓰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마트에서 구입한 물건들은 거의 모두 집으로 배달되니 쇼핑백을 싣기 위해 트렁크를 활용할 일은 거의 없다. 또한 듬직한 에어 서스펜션과 AWD 시스템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한적한 산길로 들어서도 운전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이 기특한 차는 꽤 잘 달리면서도 효율적이다. V8 4.2L TDI 엔진은 토크가 높아 액셀러레이터를 조금만 밟아도 부담 없이 가속이 이루어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통쾌함이 조금 부족하기는 해도 언제든지 오른발에 조금만 힘을 주면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간다. 게다가 적당히 속도를 내어 달려도 100L 들이 연료 탱크를 한 번 가득 채우면 웬만해서는 1,000km를 달리도록 다시 주유소에 들르지 않아도 된다. 귀차니스트인 우리 부부에게 투아렉 V8 4.2 TDI는 주유소를 자주 드나드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효자 차다.
#3. 아우디 R8 V10 스파이더
마지막으로, 극소수의 지인들 외에는 그 누구도 내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아우디 R8 V10 스파이더가 있다. 이 차의 존재는 와이프도 모른다. 이 차는 순전히 나 혼자만을 위한 장난감이다. 지붕을 벗기고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기위해 마련한 일탈의 도구다. 그래서 사무실에서도 제법 멀리 떨어진 조용한 주차장에 세워둔 이 차는 주행거리가 그리 많지 않다. 스포츠 드라이빙을 위해 쓰는 차도 아니다. 그런 용도라면 다른 차를 샀을 것이다.

이 차를 산 이유는 보기에 멋지고, 멋지게 즐길 수 있어서다. 옆구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R8 쿠페에 비하면 R8 스파이더의 스타일은 훨씬 더 매력적이다. 또한 지붕을 벗기고도 빨리 달릴 수 있고, 빨리 달리면서도 편안한 차는 그리 많지 않다. 등 뒤에서 으르렁대는 V10 엔진의 치밀하면서도 후끈한 소리도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게다가 겨울철에 몰고 나서도 운전이 썩 부담스럽지 않은 콰트로 시스템까지 달려 있어 4계절 어느 때든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차라는 것도 선택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동반석에 탄 여자들 중 어느 누구도 어색한 분위기로 차에서 내린 적이 없었다. 이것 역시 와이프가 모르는 사실이다.
* 이 차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포르쉐 911 GT3 RS

멋과 여유, 실용성과 달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차를 모두 갖췄다면, 스포츠 드라이빙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순수 스포츠카 한 대 정도는 더 있어도 좋겠다. 기회는 많지 않지만 슬슬 우리나라에서도 트랙데이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듣자하니 포르쉐 카레라 컵 레이스는 일정한 금액만 지불하면 경주차의 구입에서 관리까지 다 포르쉐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경기 날짜에 몸만 가서 참석하면 된다고 한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주요 국가를 순회하며 열리는 카레라 컵 아시아가 있으니 휴가나 여행과 묶어서 참가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자니 일단 포르쉐 911 GT3 RS부터 구입하고 볼 일이다. 경주차는 어차피 포르쉐가 관리할 테니 번호판이 붙은 도로주행용 버전 하나 더 구입해서 재미 삼아 가끔씩 야간질주를 즐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