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모터 트렌드’ 한국판 2012년 1월호에 기고한 글을 손질한 것입니다 ]

단박에 ‘사커맘(soccer mom)’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정통 미국식 미니밴 하나가 얼마 전부터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 소비자들을 겨냥해 미국에서 생산되지만 일본 브랜드인 토요타의 엠블럼을 달고 있는 차다. 토요타 시에나 얘기다.
얘기를 풀어 나가자니 물 건너 사정부터 되짚어봐야겠다. 미국 미니밴의 전성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였다. 베이비붐 세대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나이가 되고, 애들을 태우고 여기저기 다니기에 왜건보다 더 실용적이었다. 족보에도 없던 새로운 차가 금세 주류 차종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들 덕분이었다. 미니밴은 이른바 ‘사커맘(soccer mom)’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 베이비붐 세대는 미니밴을 살 나이가 지나버렸다. 생활양식과 차에 대한 인식이 다른 소비자들은 미니밴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기준으로 고르지 않는다. 그런데 자동차 메이커들의 안 좋은 습성 중 하나는 뭔가 하나를 만들어 놓으면 그 차의 개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뜯어 고치고 바꿔 새 모델을 내놓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바뀌는 소비자들의 특성과 성향이 쉽게 반영될 리가 없다.
그렇게 해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은 GM과 포드의 미니밴은 일찌감치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크라이슬러가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이미 토요타와 혼다, 닛산이 미국 메이커들보다 더 미국인들 입맛에 맞는 미니밴을 만들고 있다. 그랜드 보이저가 아니라 시에나를 보고 ‘사커맘’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이유다.


우리나라도 한때 미니밴 붐이 일었던 적이 있었지만, 사실 미니밴에 대한 인식은 미국과는 크게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미니밴은 ‘봉고차’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짐이든 사람이든 가득 채워야 돈 값을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미니밴에는 짐차의 꼬리표가 남아있다. 그러다보니 ‘큰 승용차’ 개념의 미국식 미니밴이 뿌리내리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미국 메이커 것보다 더 미국인 취향에 맞게, 그것도 달라진 요즘 소비자들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미니밴을 한국에 내놓을 생각을 하면서 토요타는 어떤 각오를 한 걸까.
겉모습은 사실 별난 구석이 없다. 미니밴은 대부분 그렇다. 실내공간을 넓히려고 최대한 상자에 가깝게 만드는 게 정석이다. 기껏해야 앞뒤 램프에 기교를 더하는 게 전부다. 캠리를 잔뜩 부풀려놓은 앞모습, 렉서스 RX를 연상시키는 테일램프는 ‘나 토요타 차요’라고 말없이 외친다.

볼륨 자체가 상당히 큰데도 언뜻 그리 커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대충 비교해 보면 차체 길이는 현대 제네시스와 에쿠스의 중간 정도이고 너비는 기아 카니발R과 같다. 뒤로 갈수록 차체가 좁아지는 느낌의 카니발R에 비하면 시에나는 차체로 공간을 최대한 키운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냉장고를 눕혀놓은 듯 네모반듯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런 게 승용차 이미지를 더욱 돋운다. 유난히 크고 넓은 슬라이딩 도어, 턱이 낮고 넓게 열리는 리어 해치는 실용성을 꼼꼼히 재고 따져 만든 차라는 것을 증명한다.
앞이든 뒤든, 도어를 열고 실내를 들여다보면 깔끔한 꾸밈새가 차분해 보이다가, 시선을 대시보드 쪽으로 돌리는 순간 토요타 차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모습이 안구를 가득 채운다. 동반석 쪽에서 센터페시아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꼴인 비대칭 디자인의 우드 그레인과 공기조절장치 배치는 단순하고 정갈할수록 기능적이라는 생각을 뒤집는다.

각종 정보가 표시되는 컬러 디스플레이가 작게, 그리고 멀리 놓여있는 게 좀 어색할 뿐, 불안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여러 장비들은 철저하게 만지고 두고 쓰기에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다. 오디오는 내비게이션이나 터치스크린 기능이 없이 단순하지만 영어 발음이 좋다면 어렵게나마 블루투스 음악 스트리밍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
시트는 모두 가죽이지만 대시보드와 도어 트림은 모두 플라스틱. 딱딱한 표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그레인 처리가 세련되어 쉽게 긁히지 않는다. 보기에도 고급스럽다. 가죽 표면 부드럽고 촉감이 좋다. 막 써도 부담 없을 소재로 만들면서도 보기에는 그리 값싸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부분도 토요타의 강점 중 하나다.

좌석은 미국식 미니밴에 흔한 3열 7인승 구성이다. 3열 좌석 얘기를 먼저 하자면, 동급 다른 차들에 비해 공간은 넉넉해도 어른 3명이 앉기에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어느 미니밴이나 3열은 ‘어린이용’이다. 어느 좌석이나 적당히 푹신해 편안한 것은 매력적이다.
좌우가 분리되어 있는 1열과 2열 좌석은 크기만 놓고 보면 어느 쪽이 상석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V6 3.5L 엔진이 올라간 리미티드 모델인 시승차는 오토만 시트가 마련된 2열 좌석이 상석 분위기다. 접이식 팔걸이도 좌우 양쪽에 모두 달려 있다. 3열 좌석을 쓰지 않는다면, 슬라이딩되는 좌석을 한껏 뒤로 밀고 다리받침을 펴면 키가 큰 사람도 다리를 쭉 뻗고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가족용 차로 쓴다면 이런 부분은 우리네 정서와는 조금 맞지 않는다. 아이들이 상석에 앉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토요타가 이 차를 들여오면서 비즈니스 수요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트가 편해도 귀한 분을 모시기에는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3열 좌석을 접고 골프백 4인분을 싣고 달리면 어떨까? 뭐 나름 쓸모야 있겠지만, 글쎄. 누군가를 모시고 골프 접대를 간다면 아무래도 4도어 세단 쪽이 모양새가 좋을 것이다. 게다가 1열 좌석 사이의 센터 콘솔 뒤쪽을 끌어내 2열에 탄 사람도 컵홀더를 쓸 수 있는 점을 빼면 2열 좌석을 위한 편의장비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이런 성격의 차에서 특히 유용한 뒷좌석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없다는 점은 아쉽다.

차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1열 좌석만큼 쾌적한 공간이 없다. 시동 때 차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공회전 때를 빼면 달리는 동안 웬만해서는 엔진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런데 시트에 누워 잠이 든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1열과는 달리 2열과 3열 좌석에서는 적잖은 소음이 들린다. 전반적으로는 부드럽지만 요철에서 약간 튀는 느낌과 주행 중의 진동도 뒷좌석 쪽이 조금 더 크다. 리어 해치 위쪽의 스위치로 3열 좌석을 바닥에 접어 넣어도 소음이 들어오는 정도는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운전자의 입장에서는 몰기에 꽤 편안한 차다. 스티어링과 액셀 반응 모두 부드러우면서 가벼운 전형적인 토요타 차 느낌이다. 마치 승용차를 모는 듯, 차의 덩치에 비해 몸놀림도 제법 가뿐하다. 스티어링 휠을 돌리는 만큼 머리와 꼬리가 민첩하게 움직인다. 3m가 넘는 긴 휠베이스에도 의외로 회전반경이 작아 운전이 쉽다. 전반적으로 부드럽게 달리지만 액셀러레이터를 깊게 밟으면 날쌔게 가속이 이루어진다. 사람을 많이 태우거나 짐을 많이 실었을 때를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수동 기능이 있는 6단 자동변속기는 변속이 부드럽고 스포티한 변속감각은 아니지만 힘이 빠지는 느낌도 없다. V6 3.5L 휘발유 엔진을 얹은 미니밴 치고는 연비도 나쁘지 않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km로 달리면 엔진 회전계는 1,800rpm을 가리킨다.
이 속도로 정속주행하면 연비가 10~12km/L 정도가 나오고, 교통량이 적지 않은 시내에서도 7~8km/L 정도다. 짐도 실어보고 사람도 태우며 약 210km를 달리는 동안 얻은 평균 연비는 8.9km/L. 공인연비인 9.4km/L와 비슷한 수준이다. 기아 카니발R 디젤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비슷한 배기량의 4도어 세단들과 실제 연료비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시에나는 미니밴 기준으로 보면 여러모로 참 흡족한 차다. 미국에서 미니밴의 원조격인 닷지 캐러밴/크라이슬러 그랜드 보이저를 위협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몰기 편하고, 실내 공간 넉넉하고, 기본적인 꾸밈새에서도 빠지는 부분이 없다.
차 자체만 놓고 보면 참 좋은데, 한국 땅에 올려놓고 보니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참 애매모호하다. ‘미니밴=짐차’라는 인식을 깨기 위해 럭셔리 이미지를 내세우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오토만 시트를 빼면 딱히 럭셔리한 부분을 찾기도 어렵다.
근본적으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 2세가 이역만리 한국 땅에 정착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살고 있는 내가 시에나를 보고 ‘사커맘’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지 되묻게 된다.